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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아! 가슴을 칼로 저미는 恨이 사무쳐야 소리가 나오는 법이여..
1960년대 초 전라도 보성 소릿재. 동호(김규철 분)는 소릿재 주막 주인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소리품을 팔기 위해 어느 마을 대가집 잔치집에 불려온 소리꾼 유봉(김명곤 분)은 그 곳에서 동호의 어미 금산댁(신새길 분)을 만나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양딸 송화(오정혜 분)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동호와 송화는 오누이처럼 친해지지만 아기를 낳던 금산댁은 아기와 함께 죽고 만다. 유봉은 수리품을 파는 틈틈히 송화에게는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쳐 둘은 소리꾼과 고수로 한 쌍을 이루며 자란다.
[스포일러 주의] 그러나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고 냉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가던 중 동호는 어미 금산댁이 유봉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과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하고 집을 뛰쳐나가자 유봉은 송화가 그 뒤를 따라갈 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소리의 완성에 집착해 약을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 유봉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를 정성을 다해 돌보지만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일을 사죄하고 숨을 거둔다. 그로부터 몇년 후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송화와 유봉을 찾아 나선 동호는 어느 이름없는 주막에서 송화와 만난다. 북채를 잡는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하고, 송화는 아비와 그 똑같은 북장단 솜씨로 그가 동호임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또다시 헤어짐의 길을 떠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은 가장 세계적인가.
판소리와 한을 주제로 한 영화에 대한 평을 글로 내뱉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다른 관객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본 것 같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동호(김규철 분)가 처음으로 던지는 대사와 함께 나오던 영어 자막 때문이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지금도 법을 공부중인 내가 영어를 알아야 얼마나 알겠냐만은 그런 내가 보기에도
배우들의 대사와 함께 나오는 영어 자막은 어설프단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함초롬히'란 말이 있다.
나는 이 말 뜻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그 뜻을 설명하지 못해도 그 말을 느낄수 있고
이 글을 보는 다른 이들도 그러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말을 영어로 표현이 가능할 것인가?
설령 표현한들 외국인들이 어찌 그것을 느낄 것이며 그보다 한발더 나아간 '한'이란 정서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등학교 시절 국사 선생님께서 한국인의 '한' 이란것에 대해 잠시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왜 그런 것이 있냐고 설명하기 보다는 그냥 한국인의 피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에 영화를 보는 내내 영어 자막이 거슬렸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느꼈다.
'함초롬히'란 말을 설명할 수 없지만 느낄수 있듯
눈 보다는 귀로 느끼고 한국인 특유의 '한'으로 본 영화인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음란서생에 나오는 이 대사가 떠올랐다.
새는 하늘만 날고 물고기는 물속만을 헤엄칠 뿐이지요. 새가 물고기를 모른다고 부끄러울 일은 아니지요.
설령 외국의 시각에서 느끼지 못하면 또 어떠랴.
영화를 보는 내내 느꼈을 차마 표현못할 가슴의 응어리를 내가 아닌 다른 이들도 느꼈으리라 확신하기에
그런 말 못할 무언가 때문에 영화의 별점 마저도 다섯개를 선사하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그런 영화였다.
아래의 음들은 전 곡 무한 반복으로 했습니다.
1. 천년학 | 대금 | 4:43 | - ChonNyunHak (Millenium Crane) Title
김소희;구음 시나위
영화 서편제 마지막 장면에 잠깐 흘렀던 곡이 바로 이 곡입니다.
허~ 제가 이 작품 재밌게 봐서 ost를 테입으로 구입했는데 그 테입에 있는 음 그대로 다 나오는데요
지금도 자료를 여기저기에서 수집하면서 음악을 듣고 있는데 하도 많이 들어서 판소리 대목도 흥얼 거리면서 따라 부르고 있는데요
소리를 얻는다, 得音
나는 알량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다. 남들이 다 본 것, 남들이 다 듣는 것,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호기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호기심을 나는 좁은 문을 통과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내리 누른다. 남들이 다 보고, 다 이야기해서 너덜너덜해진 것 보다 새로운 것을 찾는 성격은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대부(Godfather)'를 다운 받았다가 지운 것만 여러 번이고, '시네마천국(Cinema Paradiso)'은 아직도 휘파람으로는 나오는데 영화는 도통 손이 가질 않는다. 서편제도 그랬다.
선학동 나그네 때문이었을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는 분명 좋은 작품이었다. 한(恨)을 치열한 예술혼으로 승화시켜 결국에는 자연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한 소리꾼의 모습을 그린 소설은 단편 소설의 백미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투적인 느낌이 너무 싫었다. 한국은 한의 정서가 서려있고, 예술인들은 박복한 삶을 통해 그 소리를 추구해야 하고, 오누이는 꼭 그렇게 엇갈려야만 하는 상투적인 느낌들이 싫었다. 분명 작품 자체는 말이 없음에도 그 작품을 읽고 한국적 한의 승화니 예술혼의 불꽃이니 뭐니 여러 신화를 덧입힌 자들의 상투성이 싫은 때문일 것이다.
판소리를 고찰하라는 숙제가 내려졌을 때 난 서편제를 떠올렸다. 판소리에 관한 논문을 찾아서 읽어보고, 관련도서를 뒤적거려본들 판소리 한 대목을 듣는 것 이상을 고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음대 도서관에 가서 판소리 CD를 빌려서 들으면 아마 지루해서 졸거 같았다. 결국은 서편제를 보게 되었다. 나의 선택은 옳았다.
판소리는 광대 한 사람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서사적(敍事的)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을 곁들이며 구연(口演)하는 우리 고유의 민속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소리의 매력이 영화에는 담겨 있다.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이다. 그렇기에 송화는 눈이 멀었다. 눈은 그녀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과 바꾼 것이다. 한(恨)은 그녀의 소리에 울림을 만들어주었다. 살아가는 것이 한을 쌓는 것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恨)을 뛰어넘어야만 진정한 득음(得音)을 할 수 있다. 소리를 얻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소리는 순간이다. 순간이 지나가면 시간과 함께 소리는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 순간 속에 영원이 담겨 있다. 그 영원을 얻는 것이 득음(得音)이라는 경지가 아닐까 싶다. 인간은 순간이다. 우주적 시간으로 보면 인간의 인생은 점 하나보다도 짧다. 그런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은 그 자체로 순간적이다. 평생의 한(恨)도 결국 스러져버릴 것이고, 여인에 대한 정욕도 순간이요, 배고픔도 결국 잊혀 진다. 이런 희노애락을 딛고 일어서면 득음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아닐까.
영화 속 대사를 통해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 자기 소리에 자기가 미쳐서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 좋은 게 이 소리판이여“라고 송화의 아버지 유봉이가 말하는 장면이 있다. 자기 소리에 자기가 미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자신의 소리를 자기가 듣고 그것에 황홀해진다는 말이다. 또한 “나는 소리를 할 때 모든 것을 다 잊어”라는 송화의 대사가 있다. 배고픔, 멸시, 모욕, 천대, 자랑, 이 모든 것을 송화는 소리를 하면서 잊는다. 여느 것에 집중함으로 현실에서 살짝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자아를 초월하는 경지를 말한다고 느껴진다.
희노애락의 감정은 자아라는 단단한 것에서 시작된다. ‘나’라는 존재가 없어짐으로 내가 내는 소리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이고, 그 소리는 분명 인간의 속성을 벗어난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한을 쌓는 것이고 한을 쌓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가면서 삶을 넘어서는 것이고, 내 입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부르는 노래를 나의 소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듣는 것이 득음(得音)이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득음(得音)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잊고 인간사 희노애락의 사슬에서 벗어나 초월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다. 남도 구불구불한 길을 우리는 북을 치며 밀고, 달고, 맺고, 풀며 한 걸음씩 걸어간다. 구질구질하면 어떠하고, 죽으로 사흘 끼니를 때우면 어떠하리. 함께 걸을 사람이 있고, 함께 장단에 맞춰 소리 할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은 분명 고난의 길만은 아닐 것이다.
저 멀리서 아리 아리랑을 부르며 어깨춤을 추는 유봉과 그의 딸 송화, 고수 동우가 보이는 듯하다.
출처 : 블로그 > Immanuel
이명진
1. 들어가며
<서편제>는 조선시대 8명창 중의 한 사람인 박유전의 법제를 이어받은 판소리 유파의 하나로, 광주·나주·보성·강진·해남 등지에서 성행하였다. 이 소리제의 특징은 유연애절, 즉 부드러우면서도 구성지고 애절한 점이며, 소리의 끝이 길게 이어진 꼬리를 달고 있다. 서편제에 어울리는 노래로는「심청가」를 꼽고 있다. 사전에서는 서편제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하지만 사전적 의미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판소리란 말만 들어도 왠지 한(恨)의 노래요, 애끓는 기다림의 가락으로 연상하고 있다. 더구나 남도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아리랑과 ‘끼’를 한으로만 이야기하기엔 왠지 석연치 않지만 나는 그들의 예술 혼을 사랑한다.
이청준의 「서편제」는 남도사람 특유의 ‘끼’를 ‘득음’과 ‘한(恨)’이라는 정서로 표현한 8편의 연작 소설로 구성 되어 있다. <서편제>,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 <새와 나무>, <다시 태어나는 말>, <살아 있는 늪>, <눈길>, <해변 아리랑> 등에 작가 이청준이 보여 주고 있는 한(恨)과 소리 및 예술 혼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전라도 장흥 땅 주변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 되고 있는 앞의 네 작품은, ‘득음의 예술 혼’을 ‘소리’ 라 표현하는 남도의 환상적인 창(唱)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영화 『 서편제 』는 이청준의 단편 연작소설 『남도사람』중 <서편제>와 그 속편 <소리의 빛>을 원작으로 하여, 김명곤이 각색, 시나리오하고, 임권택이 감독한 작품이다. 사람들에게 준 감명의 정도가 이 두 작품 중 어느 것이 더 크다고 말 할 수는 없으나, 1993년 개봉 당시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서울에 있는 상영관에서만 관객 수가 1백 만 명 이상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을 세우며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영화"라는 장르가 현대사회를 대표하는 예술의 장르로써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앞장 선 것은 영화 『서편제』라 할 수 있다. 영화 『서편제』가 소설로써 담을 수 없는 시각적 영상과, 판소리 등의 청각적 묘미를 제시해줌으로써 소설이 갖지 못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소설 『서편제』는 영화의 대화나 장면이 표출하기 어려운 심리적 과정을 서술해 줄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이에, 소설 『서편제』가 영화화되면서 변화된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보고, 그것에 대하여 비교,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
2. 소설「서편제」와 영화 「서편제」
소설 <서편제>는 이청춘의 연작 소설집 <남도 사람>(1978)에 담긴 단편 소설로, <뿌리 깊은 나무>(1976)에 발표되었다. 한(恨)과 득음, 소리와 억압에 대한 예술 혼을 주제로 다룬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 중에 가장 먼저 창작되었다.
소설의 작중 화자와 주인공이 이중, 삼중으로 겹쳐지는 방법을 통해 진술되어지는 방식으로 각 연작 소설들이 이어져 있다. 그 중에서 <소리의 빛>은 <서편제>의 속편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서편제>는 이청준 원작의 단편 소설을 임권택이 감독하고 김명곤이 각색하여 태흥 영화사에서 제작한 영화이다. 제 31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임권택). 촬영상(정일성). 녹음상(강대성, 김범수). 남우 주연상(김명곤). 신인 여우상(오정혜). 신인 남우상(김규철)의 6개 부분을 수상한 영화이다.
영화 <서편제>는 의남매로 만나 헤어진 두 사람이 수년의 세월이 흐른 뒤 어렵게 만나 노래로 밤을 지새우고 다시 헤어진다는 서사 구조를 큰 축으로 하여 판소리와 아름다운 영상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작품이다. 이청준의 연작 소설 중 <서편제>에서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 소리꾼 일가의 방랑, 동호가 떠난 후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 게 한 뒤 죽는 것 등 영화의 기본 줄거리를 채록했고 <소리의 빛>에서는 송화와 동호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만나 다시 말없이 헤어지는 내용을 채록하여 영화의 결말 부분에 담았다. 또한, 영화의 줄거리에 조응할 만한 우리 고유의 판소리가 삽입되어 영화는 더욱 빛을 발 했다고 할 수 있겠다.
3. 서편제 줄거리
3-1 소설 줄거리
서편제는 전라도 보성읍 밖의 한적한 길목에 있는 소릿재 주막에서 한 사내가 주인의 소리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주막집 여인의 소리에 빠져 들던 사내는 이제는 죽은 어느 남정네 소리꾼 이야기를 듣게 된다. 소리꾼은 눈먼 딸아이를 데리고 정처 없이 떠돌았는데 죽고 나자 소리는 딸아이에게 이어졌고, 그 딸의 소리에서 사람들은 애비 소리꾼의 소리를 듣는 다고 했다. 그러나 죽은 소리꾼은 그 주막에 손님으로 찾아온 사내의 의붓아버지였다. 주막 손님인 동호가 어렸을 적, 당시 과부였던 어머니는 떠돌이 소리꾼이었던 유봉과 야반도주를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해산 도중 딸을 낳고 숨을 거둔다. 유봉은 어린 동호와 송화에게 각각 북과 소리를 가르쳐주며 마을을 전전하나 외국 노래에 밀려 생활은 점점 어려워지고, 천한 소리꾼이라는 핍박과 의붓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에 괴로워하던 동호는 가출을 한다. 이에 송화는 소리를 거부하나, 소리꾼 아버지 유봉이 청간수라는 약으로 눈을 멀게 한다. 의붓아버지에 의한 여동생의 실명은 여러 가지 추정을 만든다. 아들 동호가 소리꾼 곁을 떠나고 나서 딸마저 자신의 곁을 떠날까봐 실명을 시켰다고도 하고, 눈으로 뻗칠 사람의 영기를 귀와 목청 쪽으로 옮겨가게 하여 소리를 더욱 잘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보다 소리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소리꾼 아비의 이야기를 듣고 동호는 송화와 함께 가슴에 말 못할 한(恨)을 느낀다. 여기까지가 소설<서편제>의 줄거리이다. 반면 소설<소리의 빛>에서는 전편을 계기로 송화는 다시 소리를 시작한다. <서편제>의 속편인 <소리의 빛>에서는 전라도 장흥 땅 산골 주막에서 천신만고 끝에 누이를 찾아 서로 상봉하는 하룻밤 사이의 일을 그리고 있다. 동호는 북을 잡고 누이에게 소리를 청한다. 밤새 소리판을 벌이던 오누이는 잠자리를 함께 한 뒤 새벽에 말없이 헤어진다. <소리의 빛>에서는 전편인 <서편제>에서의 원한이 한으로 되어가는 과정과 그리움이 한이 되어가는 모습이 서럽게 묘사 되고 있다. 소리꾼이 왜 딸애의 눈을 멀게 하여 한(恨)을 소리로서 토해 내도록 만들었는지와 동호가 어머니의 원수로 인지되었던 "소리"를 이해하게 되며 기구한 삶을 하룻밤의 소리로 달래는 과정이 애뜻하게 풀어지고 있다.
3-2 영화 줄거리
태흥 영화사에서 제작한 <서편제>는 1993년 4월에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관객 113만 명 이상을 동원하면서 한국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을 받았다.
1960년대 초 전라도 보성 소릿재, 30대의 동호(김규철 역)는 소릿재 주막주인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들으며 회상에 잠긴다. 소리품을 팔기 위해 어느 마을 대가집 잔치집에 불려온 소리꾼 유봉(김명곤 역)은 그곳에서 동호의 어미 금산댁을 만나 자신이 데리고 다니는 양딸 송화(오정해 역)와 함께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동호와 송화는 오누이처럼 친해지지만 아기를 낳던 금산댁은 아이와 함께 죽고 만다. 유봉은 소리품을 파는 틈틈이 송화에게는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쳐 둘은 소리꾼과 고수로 한 쌍을 이루며 자란다. 그러나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줄고 냉대와 멸시 속에서 살아가던 동호는 어미 금산댁이 유봉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과 궁핍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집을 뛰쳐나간다. 유봉은 송화 또한 떠나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소리의 완성에 집착해 약을 먹여 송화의 눈을 멀게 한다. 유봉은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송화를 정성을 다해 돌보지만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송화의 눈을 멀게 한 일을 사죄하고 숨을 거둔다. 유봉이 죽자 송화는 떠돌면서 소리를 하며 살아간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송화와 유봉을 찾아 나선 동호는 어느 이름 없는 주막에서 송화와 만난다. 북채를 잡은 동호는 송화에게 소리를 청하고, 송화는 아비와 똑같은 북장단 솜씨인 그가 동호임을 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시 헤어짐의 길을 떠난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연출자인 임권택 감독의 변은 “이청준의 원작소설은 우리 판소리의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다. 원작을 바탕으로 남도의 아름다운 자연, 한을 맺고 푸는 사람들의 삶, 우리 소리의 느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영상을 그리고자 했다. 우리 판소리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 양식인지를 알리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평론가들 역시 “가장 낮은 소리로 우리의 꿈은 이제 어떻게 되어 버렸는지, 우리의 정서는 이제 어떤 모양으로 변해버렸는지를 소리꾼 집안의 연대기적 서술로 그려내고, 영화 속의 힘은 고난과 만남에 의해 발동하고 혼을 일으키는 소리와 장”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국 기네스북에는 최다관객동원 영화로 기록되었다.
4. 소설 서편제가 영상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변화와 그 의미 해석
① 이복남매 → 피한방울 안 섞인 남매
송화가 소설 속에서 동호의 어머니와 소리꾼 사이에서 태어난 동호의 동생으로 그려져 있는데 반해 영화 속에서는 조실부모한 고아로서 유봉이 명창을 만들기 위해 데려다 기른, 말하자면 유봉이나 동호와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이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것은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각색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후에 영화에서 유봉이 말한 바와 같이 송화가 조실부모한 고아라는 것이 송화에게는 장님이 되는 것과 더불어 또 하나의 한으로 설정된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시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각색이라고 한 것은 소설이 순차적이며 연속적인 현실의 시간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고 새롭게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반면, 영화에서는 이러한 시간과 사건의 재배치가 영화의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② 동호의 여동생 → 동호의 누이
소설에서는 송화가 동호의 어미와 소리꾼 사이에서 태어나 동호의 동생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영화에서는 동호의 누이로 설정되었다. 문학은 언어의 상징성과 함축성으로 독자에게 그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넘어갈 수 있다.그러나 영화에서는 모두 화면에 담아내야 하므로 송화가 소리를 배우게 되는 과정을 화면상에 담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가 있기 때문에 동호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소리를 배워 기본을 익힌 후부터의 내용을 담아 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동호와 송화간에 볼 수 있는 애정의 감정이 자칫 근친상간으로 비칠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이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③ 영화에서 송화를 명창으로 만들기 위한 유봉의 노력 묘사 첨가
소설에서는 송화를 명창으로 만들기 위한 유봉의 노력이 거의 묘사되고 있지 아니한데 반하여 영화 속에서는 그 과정과 노력이 비교적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유봉의 소리꾼으로서의 소리에 대한 그의 신념과 판소리에 대한 사랑을 관객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그럼으로써 소설 상에서 자칫 유봉의 절대 부권적 권위주의의 행사(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어 눈을 멀게 한 것 →내 딸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해석 가능)에 대해 한결 비이기적인 부권행사로 이해해 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기 위한 감독의 설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유봉의 과거 즉 판소리 명창의 수제자였던 그가 스승의 애첩이었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여자가 자살함으로써 그가 떠돌이 소리꾼이 된 배경을 삽입(과거 수제자에서 동료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파문당해 떠돌이 소리꾼으로 전락)함으로써 그 떠돌이 소리꾼의 한 또한 간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④ 동호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살의의 감정의 변화
소설에서는 동호의 소리꾼 아비에 대한 살의가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심지어 여동생과 재회하는 순간에서도 그 살의는 해소되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그 소리꾼 아비가 자신의 어머니의 생명을 앗아간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동호의 한이며 이러한 한은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으로 형상화되어 선학동 나그네 이후의 스토리 전개는 이러한 동호의 한을 매개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한다. 반면 영화에서는 동호는 불만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여인으로 느끼기 시작한 송화가 수모를 당하는 것이나 극도의 가난에 대해 불만을 품은 것에 그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동호의 한은 영화에서 부각되지 아니하며 나중에는 오히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이것은 소설과 영화에서 송화와의 재회의 이미지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⑤ 아비가 송화의 눈을 멀게 한 방법과 이유의 차이
소설에서는 아비가 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음으로써 눈으로 뻗는 정기를 목청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는 반면 영화에서는 소리꾼 아비가 보약에 많은 양의 부자를 넣어 송화에게 먹임으로써 장님이 되게 한다. 이것은 소설과 영화의 매체상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또 하나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소설에서 애비가 송화의 눈에 청강수를 넣는 것은 그것이 문자로써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일 뿐 그 이미지나 화면의 구체적 형상이 직접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 반면 영화는 언어의 관념적인 이미지를 직접 구체적 그림으로써 관객에게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각색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즉 아비가 딸의 눈에 청강수를 넣을 경우 송화가 순순히 이에 따르지도 아니할 뿐만 아니라 그 모양새가 영 부자연스럽게 보일 것이다. 또한 아무리 소리를 사랑하는 송화라 할지라도 그런 아비의 행태를 그리도 쉽게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소설이 언어의 관념성과 추상성 그리고 상징성에 기초함으로써 비교적 사실성이나 현실성의 부족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운 반면 영상매체인 영화의 경우 공상과학영화가 아니고서는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reality를 그 본질적 요소로 한다는 속성상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⑥ 그 밖의 여러 가지 극적인 요소의 삽입
소설이 영상화 될 때는 대중의 취향과 기호에 상응하는 요소들이 첨가되고 있다는 것인데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이러한 극적 요소와 극적 사건들의 삽입이다. 여기서 대중의 취향은 환상성이나 감상성 그리고 선정성과 해학 그리고 소란스러움을 의미한다고 본다. 영화 서편제에서는 소설에서는 읽을 수 없는 위와 같은 대중적 취향을 여러 가지 움직임과 소리 그리고 극적 요소와 사건성의 도입으로 살려내고 있다. 예를 들면 동호가 남자들 앞에서 소리를 하는 송화를 보며 남자들의 행태를 못 마땅해 하는 얼굴의 움직임 장면과 남자들이 송화의 가슴에 돈을 집어넣는 장면 등은 위의 대중적 취향을 고려한 감독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약장수 씬에서 서양문화에 침식되는 우리 소리의 모습을 삽입하므로 서양의 음악으로 인해 소리가 점점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그러므로 소외되어가는 소리꾼의 한을 한층 더 깊게 해 주고 있다.
5. 끝맺으며
한(恨)이란 욕구·의지의 좌절에 따르는 삶의 파국에 대처하는 편집적(偏執的)·강박적인 마음의 자세와 상처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얽힌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한이 발생하거나 생성되는 조건으로 남이 부여하는 경우와 스스로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앞의 것은 타인·사회제도·환경 등이 한이 맺히게 될 사람의 욕구나 의지를 좌절시키고, 그 좌절이 삶의 파국을 초래하는 경우이다. 뒤의 것은 스스로 후회할 행위를 한 경우이다. 그렇다면 <서편제>에서 이야기 하고자 하는 한(恨)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가난과 불운은 동호가 숙명적으로 느껴야 했던 심리적 업악과 삶의 분출일 터이다. 그래서 소설에서 그려지고 있는 소리(창)는 득음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恨의 대변이며 도덕적, 인습적, 정치적 恨의 표출이며 그 승화가 아닐까 싶다. 1993년 오정혜라는 스타를 만들었던 판소리 영화는 그래서 더욱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리라.
“뭔가 만날 수 있다는 그리움,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것, 난 그것을 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감독의 생각을 바탕으로 영화 ‘서편제’는 득음의 경지 즉 예술혼의 경지를 恨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恨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지 아니하며 한편의 풍경화를 그려내듯이 자연스럽게 우리네 恨의 일상사를 판소리로 그려낸 것이다. 이 점이 관객들에게 많은 공감을 준 요소였을 것이라 본다. 또한 작가 이청준의 여러 작품에서 나타나고 있는 예술 혼과 장인 정신의 혼불이라 생각된다.
소설에서 많은 복선들이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여름 햇덩이가 하나 있었고, 이것은 어렸을 적부터의 한 숙명의 태양’이라는 것과 ‘파도비늘이 반짝이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해변가 언덕밭, 이 한 모퉁이를 무덤가 잔디밭에 허리 고삐가 매여 지내고 있는 소년’과 ‘물결 위를 떠도는 부표처럼 가물가물 콩밭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하루 종일 그 노랫소리도 같고 울음소리도 같은 이상스런 콧소리 같은 웅웅거리는 노랫가락 소리’, 또 ‘진종일 녹음 속에만 숨어 있던 노랫소리가 비로소 뱀처럼 은밀스럽게 산 어스름을 타고 내려와 그 뱀이 먹이를 덮치듯이 아직도 가물가물 밭고랑 사이를 떠돌던 소년의 어미를 후다닥 덮쳐 버린 소리의 얼굴’등이 그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에서 “소리는 얼굴이 없었으되, 소년의 기억 속엔 그 머리 위에 이글거리던 햇덩이보다도 분명한 소리의 얼굴이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언제나 뜨겁게만 불타고 있던 햇덩이야말로 그날의 소년이 숙명처럼 아직 그것을 찾아 헤매 다니고 있는 그 자신의 운명의 얼굴 이었다”는 ‘운명적 삶’은 동호가 다시 소리를 찾아 나선 것과 같이 오늘도 우린 매양 그리워하며 살고 있을 일이다.
그래서 서편제는 남도사람들에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소리로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 참고문헌
* <이청준 연작소설 서편제> 열림원
* 임권택 엮음, 『영화 서편제 이야기』, 서울 도서출판 열림, 1993
* [문학과 지성] 여름호(1979) 발표, 그외 [서편제](1993) 수록
* 임권택(편저), "서편제" 영화이야기, 하늘, 1993
출처: '열린 문학회' 다음 카페
제가 욕심을 부려 자료가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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