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교정시설...(사건사고포함)

[스크랩] 1975년 6월 20일 이팔국 아내 살인 사건

최강동원 2013. 6. 13. 09:56

 

 


 

“인간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상상하기도 힘든 잔인-엽기 범죄가 터질 때마다 언론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인간성 부재를 한탄하곤 했다. ‘토막살인’ 용어가 처음 등장한 1965년 ‘춘천호반 여인 살해사건’이후, 같은 유형의 범죄는 70년대 들어와 더욱더 기승을 부렸다. 잊을만하면 꼭 한 건씩 발생해 사람들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완전 범죄'를 기대하며 시체 훼손하는 범인들

 

 

토막난 천륜 
1971. 5. 21 [경향신문] 8면

살인도 모자라 시체를 훼손하는 경우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분노에 미쳐 살인했지만 증거를 없애 범행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개 피해자와 가까운 사이여서 자신만 입을 닫으면 완전범죄가 된다고 착각한다는 얘기다. 71년 5월

김해에서 일어난 60대 중풍환자 살인사건 범인은 아내였다. 그리고 의대에 다니는 아들이 시체를 절단한 제 2범행의 공범이었다.


언론이 ‘토막 난 천륜(天倫)범죄’라고 개탄한 이 사건 가족들은 알코올 중독에 중풍환자인 피해자가 “술과 돈을 달라며 떼를 쓰는 데 질려 범행했다”고 말했다. 아내는 남편에게 독이 든 막걸리를 줘 살해한 뒤, 자연사한 것처럼 꾸미려했으나 여의치 않자 아들과 함께 시체를 잘라 쓰레기장에 내다버렸다. 그들은 “중풍으로 쓰러져 누워 지내면서도 계속 술을 달라고 떼를 쓰는데다 몸에서는 악취까지 풍겨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해 서울에선 넝마주이들이 동료를 살해한 후 시체를 잘라 암장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74년 강진에서는 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며 부부싸움을 하던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뒤 토막 내 버리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75년 대구에서는 맡긴 시계를 팔아먹고 달아난 시계수리공이 우연히 길에서 시계주인을 마주치자 옛 범죄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지문을 못 뜨게 시체를 분해해 연못에 내다버렸다.

 

엽기 범죄의 결정판 '이팔국 아내 살인사건'

 

모두가 끔찍하고 엽기적인 살인이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언론은 개탄했지만 ‘카피 캣’(모방범죄자)들은 범죄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있다는 망상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수법은 점점 더 잔인해졌고 범행의 결정적 증거인 사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하거나 없애는 수법도 갈수록 교묘하고 치밀해졌다. 75년 6월 서울 명륜동에서 일어난 아내살인 및 사체분해사건은 그런 면에서 잔인 혐오범죄의 종결편이라 부를만했다.


75년 6월30일 오전. 긴급기자회견을 요청한 동대문경찰서장의 첫마디는 “세상에 어떻게 이런 끔찍한 범죄가 다 있을 수 있습니까?”였다. 경찰의 수사 간부라면 잔인하고 엽기적인 범죄수법을 익히 알고 또 들었을 터. 그런 경찰서장이 몸서리를 치며 혀를 내두를 정도의 범죄라니, 기자들은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후일 일반 강력사건들과 달리 아예 범인의 이름을 따서 ‘이팔국 아내 토막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그의 범행은 말 그대로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냉혈한 엽기범죄의 결정판이었다.

내연의 처를 토막 살해 
1975. 6. 30 [동아일보] 7면


 

 

 

 

 

 

 

 

 

 

 

 

 

 

 

 

 

 

 

부부싸움 끝 살인, 잔혹의 극치로 치달아..

 

 

후처 살해…시체분해 하수구·쓰레기장에 버려 
1975. 6. 30 [경향신문] 7면

 

이팔국. 47세. 다방과 양장점을 운영하는 아내(후처)에 얹혀살면서도 걸핏하면 손찌검을 하고 지내던 그는 열흘 전 6월20일 아내와 심하게 다투다 격분해 목을 졸랐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살 바에는 아예 갈라서자”고 다그치는 아내를 패다 손등을 할퀴게 되자 이성을 잃은 것. 여기까지야 어쩌다 있을 수 있는 부부싸움 끝 살인이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는 아내의 시체를 ‘완전히 없애버려’, 범행 자체를 없던 일로 돌리려했다.


새벽 1시쯤 그는 시체를 목욕탕으로 옮겼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짐승보다 더한 일을 그는 무려 5시간 동안 꼼꼼히 치렀다. 피부와 머리카락은 태워서 없앴다. 그는 집에서 자던 전처소생의 아이들에게 “누가 물으면 엄마는 20일 새벽에 집을 나간 뒤 일절 소식이 없다고 하라”는 등 입막음도 시켰다. 오전 중에 집안 소독을 완전히 끝낸 뒤 밤에는 연탄재에 섞은 뼛가루를 비닐봉지에 담고 시멘트 부대로 싸 집에서 1km 가량 떨어진 페인트 상회 옆 한 쓰레기하치장에 갖다버렸다. 이어 김칫독에 묻어둔 사체도 버킷에 담아 두 차례에 걸쳐 동네 쓰레기장에 내다버렸다.


 

 

 

 

 


 

 

 

 

 

 

 

 

 

 

 

 

 

 

 

 

 

 

 

 

 

 

 

 

정말로 단 한 점 남김없이 사체를 처리했으니 그는 자신이 완전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여유롭게 산책도 하는 등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그만의 착각이었다. 살해, 분해된 부인의 전남편 소생인 딸은 어머니가 사흘째

운영하던 의상실에 모습을 보이지 않자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딸은 특히 성격이 포악하고 걸핏하면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의붓아버지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귀띔을 했다.

 

정황증거 포착한 경찰, 가족들 불러 대질심문

 

경찰은 일단 실종사건 수사에 착수하면서 이팔국의 가정사에 주목했다. 6년 전 전처와 사별했고 충무로에서 다방을 하던 현 부인과 2년 전부터 가까워져 동거를 시작했다. 그전에 그는 자기 집 가정부를 강간해 입건된 일이 있었고 자질구레한 사기 사건에도 몇 번 연루된 적이 있었다. 실종수사를 나간 형사에게 사근거리며 “아내를 꼭 좀 찾아 달라”고 간청하는 것도 연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손등에는 깊게 할퀸 상처가 나있고 며칠 전 집안에서 뭔가 타는 냄새가 나고 하루 종일 소독도 했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는가.


뭔가 수상한 구석은 많은데 전혀 증거가 없었다. 범행 현장인 목욕탕은 정말 먼지 한 점 없을 정도로 깨끗이 닦아 놓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태에서 다시 새로운 정황증거가 떠올랐다. 평소 자주 이혼문제로 싸우던 그가 최근에 느닷없이 혼인신고를 해놓은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갈라서 재산분할을 할 것에 대비해 부인 몰래 혼자 신고를 한 것이었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사건 당일 대판 싸움을 한 것이었다.

전례없는 극흉 살인극 
1975. 6. 30 [경향신문] 7면


 

 

 

 

 

 

 

 

 

 

 

 

 

 

 

 

 

 

 

 

부인의 실종신고가 접수된 지 6일째. 경찰은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해 전처소생 및 의붓자식들까지 모두 출두시켜 대질

심문을 벌였다. 아이들은 역시 “20일 새벽 둘이 싸우다 조용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역겨운 냄새가 났는데 아버지가 ‘벌레가

끓어 그런다’며 소독을 했다”고 증언했다. 한 아이는 “뭔가 태운 냄새와 정육점에서 나는 냄새가 섞여서 났다”고도 했다.

 

범인의 자백으로 사건은 해결했지만..

 

 

세상이 이래서야.. 
1975. 7. 14 [동아일보] 5면 

길고 긴 심문이 계속되자 이는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특히 전처소생 아이들까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계속하자 신경질을 내며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사건발생 열흘째인 6월29일. 이는 “손을 할퀴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아내 목을 졸랐다”며 범행내용을 자백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경찰이 타이프라이터도 없이 펜으로 진술조서를 받던 때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냥 잔혹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사체 처리 과정을 그가 진술하자 담당형사는 몸서리치며 펜을 내동댕이치기도 했다.


훗날 형사는 “그가 진술을 시작하자 갑자기 내 앞에 악마가 도사리고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고 말했다. 너무나 역겨워 진술을 받는 내내 줄담배를 피워댔고 입술을 깨물어 상처가 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의 자백을 받아내자마자 동대문경찰서는 온 형사를 다 동원하다시피 해 행여 남아있을지도 모를 사체 증거물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이가 무서울 정도로 꼼꼼하게 사체를 처리해 이튿날 기자회견을 할 때까지 어떤 잔해도 찾아내지 못했다.


 

 

 

 

 

 

 

 

 

 

 

 

 

 

 

 

 

 

 

 황당한 것은 이가 부인을 살해한 날 저녁 뼈가루를 연탄재에 섞어 버리는 것을 페인트 상회 주인이 발견하고 신고했으나

"쇠 뼈같다"며 그냥 쓰레기 속에 던져버린 것이었다. 사람의 뼈를 그런 식으로 처리할 것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사건을 조기 해결할 번한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경찰은 나중에 이의 집 목욕탕을 거의 다 뜯어내다시피 하며 수색작전을

벌여 하수구 밑에서 작은 뼛조각 몇 개를 찾아냈다.

 

80년대까지 끊이지 않는 모방범죄 횡행

 

범인이 검거된 지 1주일 만인 7월 8일 0시부터 현장검증이 실시 됐다.당시는 통행금지가 있었을 때인데도 주민들 50여명이

몰려 범행 재연을 지켜봤으며 치를 떨며 “저놈 죽여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이를 앙다문 채 특별한 표정변화도

보이지 않으며 목을 조르는 순간부터 시체분해까지 과정을 냉정하게 재연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됐다. 그러나

그런 죄 갚음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니었다. 70년대 중후반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카피 캣들은 끊임없이 흉악범죄를

만들어냈다.

 


 

민병욱 / 전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1976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편집국 사회1부장, 정치부장, 부국장, 논설위원을 거쳤다.
2009년 7월까지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들꽃 길 달빛에 젖어> <민초통신 33>이 있다.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7956&path=|458|538|&leafId=802

 

출처 : 미제사건추적-그들은살고싶었다
글쓴이 : 고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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