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심의 대가가 목숨 [2009.03.13 제751호]
서울구치소에서 1968년~97년 무죄·양형 부당 주장하며 죽은 사형수 모두 13명
“주범이 자기 자신이 죽였다고 했고, 나는 안 죽였다고 했는데….
우리나라 법은 개판이다. 돈 없으면 안 했어도 죽인다.”
1994년 10월6일 서울구치소 사형장. 이필완(당시 41살)씨는 “마지막 할 말은 없느냐”는 구치소장의 말에 이렇게 외쳤다. 강간살해죄로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였다. 가슴에 품은 원한이 터진 듯한 큰 목소리였다고 한다.
그는 수감 기간 내내 억울함을 주장했다. 종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교가 없다 보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교화위원(교화를 맡은 성직자나 신자)도 없었다. 당시 형 집행을 지켜봤던 문장식 상석교회 목사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내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혁당 사건 첫 공판 모습(왼쪽). 1975년 4월9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8명이 판결 18시간 만에 형 집행을 당했다.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오른쪽). 1975년 사형판결을 받았던 이들은 지난 2007년 1월 재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오심’으로 인한 사형 집행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자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돈이 없으면…” “언론 보도에 의해…”
뒤이어 오태환(당시 35살)씨가 사형장에 끌려나왔다. “국가에 할 말이 있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나는 범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여론에 의해 심증으로 재판받은 것을 부당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을 뱉었다. 오씨는 양평 일가족 생매장 살해사건의 공범으로 사형이 확정된 터였다.
그의 주장의 취지는 공범들이 자신까지 끌어들였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그런 주장을 기각했다. 오씨는 “제가 죄지은 것은 달게 감당하겠습니다. 하지만 최고수(사형수)의 죄를 개별적으로 따져보지도 않고 언론 보도에 의해 처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라고 말을 맺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다. 억울하다고 주장해도 형은 중단되지 않는다.
이날 서울구치소에서는 모두 10명의 사형수가 사형됐다. 이 중 2명이 ‘억울하다’며 죽었다. 사형 집행을 지켜본 종교인들과 교도관들은 ‘사형장에서는 거짓말이 없다’고 말한다. 죽는 순간에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해봐야 형 집행이 중단되지 않는다. 교도관의 화를 부르면 더 빨리 형장으로 끌려 들어간다. 목숨을 재촉하는 짓인 셈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교화위원·교도관들과 맺어온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고 가는 짓이다. 물론 마지막 말까지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다.
문장식 목사는 “억울한 죽음을 주장하는 이들은 평소 교도소에서의 생활이나 주변에 하는 말을 통해 진실성을 인정받은 이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1983년 법무부가 ‘종교위원’(현 교화위원) 제도를 처음 도입할 때부터 1987년까지 서울구치소에서 60명의 사형에 입회했다. 최장기·최다 입회 교화위원이다.
<한겨레21>은 1968년부터 1997년까지 서울구치소에서 목숨이 끊어진 사형수들 중에서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긴 사형수들을 찾아봤다. 문장식 목사가 현장에서 기록한 유언과 교정 당국의 기록, 그리고 공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했다.
이 기간에 억울하다며 죽어간 사형수는 모두 13명이었다. 살인 자체를 부정한 이들은 모두 7명이었다. 다른 2명은 살인이 아닌 폭행치사라고 주장했다. 살인과 폭행치사는 사형과 유기징역의 차이다. 하늘과 땅 차이다. 양형이 부당하다고 주장한 이도 2명 있었다. 무기징역을 받을 정도인데 사형을 당한다는 취지다. 나머지 2명은 공범이 ‘양심선언’을 통해 그들은 무죄라고 밝힌 경우였다.
1985년 8월30일 사형당한 최은수(당시 30살)씨는 현직 경찰관이었다. 그는 “나는 억울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재판을 맡은 자들이 다시는 오판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어 억울한 일 당하는 자가 없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오판한 자와 위증한 자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농협 직원 2명을 살해한 강도살인죄로 기소됐지만, 끝까지 억울함을 주장했다.
1968~97년 서울구치소에서 ‘억울하다’고 유언을 남긴 사형수
“법정소란죄 적용돼 무기징역이 사형으로”
1991년 12월17일 사형된 윤도영(당시 38살)씨는 폭행치사를 주장했다. 윤씨는 채권자를 유인해 살해한 죄로 1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85년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문장식 목사는 “윤도영은 피해자와 심한 언쟁을 벌이다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는데, 피해자가 쓰러지면서 퇴비 항아리에 머리가 깨져 숨졌다고 주장했다”며 “그래서 1심에서 무기형을 받은 것이 억울해서 고등법원에 항소했는데, 검사가 계획살인이라고 하면서도 살해 도구라는 삽을 증거물로 제시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문 목사는 “윤도영이 2심 재판 당시 검찰 쪽 증인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자 ‘위증이다’라며 수갑을 던지려 하고, 삽으로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주장에 분개해 판사와도 언쟁을 했다”며 “이 때문에 ‘법정소란죄’가 적용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전했다.
윤씨의 이런 사연이 외부에 알려지자,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국회에서 처음으로 ‘사형수 특별감형안’이 상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구명운동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그는 죽음을 맞았다. 윤씨는 집행 직전에 구치소장 등 심문대에 앉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버튼을 눌러 사형 집행 신호를 하던 보안과장을 향해서는 “과장님, 금년에 꼭 진급하십시오”라고 외치기도 했다. 보안과장은 한동안 심한 가슴앓이를 했다고 한다.
1997년 12월30일 광주교도소에서 목숨이 끊어진 강순철(당시 29살)씨도 논란이 많았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강도살인과 방화. 1990년 5월7일 서울 용산구의 한 지하 가내공장에 침입해 여직원 2명을 칼로 위협해 금품을 턴 뒤 석유를 끼얹고 불을 냈다는 죄목이다. 이 불로 여직원 1명이 사망하고 1명은 중화상을 입었다. 강씨는 범행 뒤 집에서 술 취한 채 잠들어 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자신을 버린 여자친구를 찾아 공장에 간 것이고,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함께 붙잡힌 공범은 강씨의 범행을 주장했다. 그는 사형 집행 며칠 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도 살았으니, 내일도 살고 싶다.” 그에게 내일은 길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사형수는 아직도 있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2명의 사형수가 ‘억울하다’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다. 강도살인으로 4명의 목숨을 빼앗은 죄로 1999년 사형이 확정된 이아무개씨와 중미산 일가족 살해사건의 주범으로 2003년 사형이 확정된 정아무개씨다. 이들은 사형이 확정된 뒤 6~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재심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천주교 사회교정사목위원회 이영무 신부는 “이들의 주장을 듣고 변호사와 함께 공판 기록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들 주장의 진실성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다. 같은 사목회의 손선하 수녀는 “재심을 청구하려면 증거도 중요하지만, 거액의 변호사 비용도 감수해야 한다”며 “이미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진 상태에서 누가 그런 비용을 대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사형의 경우에도 오판율이 생각보다 높다”
서울구치소의 불교 쪽 교화위원으로 활동했던 황수경 동국대 강사는 “사형의 경우 오판율이 생각보다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2002년 무기수로 감형된 김인제씨의 경우를 들었다. 황수경씨는 “김씨는 사건 당시 술에 만취된 상태로 기억이 없었지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재판 당시 공소 사실을 모두 시인했고 결국 사형이 확정됐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공범로 무기징역형을 받았던 친구가 ‘여자친구를 숨지게 한 것은 자신’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김씨는 초범이라는 점, 모범적인 수감생활 등이 반영돼 무기형으로 감형된 상태지만, 사건의 진실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황씨는 “지금 사형수들 중에서도 사형 집행 뒤에 그의 혐의가 거짓이라고 드러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야 죽이고 나면 그뿐이지만, 죽은 그 사람의 생명과 가족들의 아픔은 누가 어떻게 갚아줄 것인지…”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