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청송교도소 남태섭 교도관 교도소 밖 세상
위클리경향 | 입력 2008.10.30 13:58
청송교도소의 수형자가 병이 걸리면, 일단은 교도소 의무관이 살피고, 만약 정도가 심하면 안동 시내 민간병원으로 위탁진료를 오게 되는데, 우리병원은 청송교도소에서 위탁된 환자들이 가끔 진료를 위해 들르는 안동 시내 몇 군데 병원 중 하나다. …그 다음 이유로는 좀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바깥 구경을 하기 위해서다. 오랫동안 교도소 안에 갇혀 있으면 바깥이 궁금해지는데, 바깥 구경을 하려면 병에라도 걸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어지간한 상처로는 교도소 내에서 치료를 받기 때문에 칫솔을 삼키거나 숟가락 또는 젓가락을 삼켜 큰 일을 만들어낸다. 일단 이런 일이 발생되면 내시경으로 제거하거나 심하면 개복을 해서 수술로 제거해야 하므로, 수감자들이 이물질을 삼키지 못하게 방어하는 것도 교도관들에게는 큰 업무 중 하나라고 한다. 며칠 전 병원에 온 수형자는 몸에 포승줄을 수십 겹으로 감고 수갑을 손목과 발목, 심지어 허리까지 가죽으로 된 계구를 차고 교도관 네 명과 함께 병원으로 왔다. 포승과 수갑을 푸는 데만 20분 이상 걸릴 정도로 그야말로 겹겹이 묶여 있었는데, 병원에 온 이유는 대못을 삼켰기 때문이다. 그는 호흡이 가빠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눈은 연신 사방을 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주변에서 쳐다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세상이란 곳을 호흡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 그림을 사진 찍어대는 것으로도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 박경철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중에서
도관 생활 10년이면 징역이 5년'이란다. 남태섭(43) 교도관이 교도소에 근무한 지도 벌써 14년째이니 이미 5년형은 훌쩍 넘긴 셈이다. 그것도 그 악명(?) 높은 청송 교도소에서만. 1980년 신군부가 만든 사회보호법에 따라 태어난 청송보호감호소는 멀고 먼 거리만큼이나 아득한 세상의 끝이었다. 2005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에 따라 사회보호법은 종언을 고했지만 청송보호감호소 하면 느껴지는 아득함만은 여전하다. 그리고 청송 교도소는 여전히 우리나라 '교도소의 메카'다. 그것도 초임 교도관들에 기피 대상 1호 근무지인.
교도관. 공안 직군 중 교정직이 직렬인 공무원(네이버 백과사전). 아마도 공무원 중 교도관처럼 험한 직군도 드물 것이다. 육체적 고역도 고역이지만 정신적 긴장에서, 특히 그 질에서 험하기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게다가 사회의 부정적 인식까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힌다.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현저히 늘어나면서 교도관들은 거꾸로 비뚤어진 인권의식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수용자들로부터 인권침해를 빌미로 툭하면 진정과 고소, 고발을 당하기 일쑤고, 심지어 수용자들의 무차별적인 폭행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통계에 따르면 2003년부터 지난 8월까지 수용자가 교도관을 폭행하는 사건이 551건이나 발생해 593명의 교도관이 피해를 입었으며, 2004년에는 교도관이 수용자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남 교사(교정직 8급)가 교도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부친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다. 청송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청송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한때 일본에 체류하면서 관광산업에 종사할 꿈을 꾸기도 했으나 유교적 완고함을 지닌 부친은 장남인 그가 공직에 진출하기를 바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공직에 들어갈 길을 찾게 되었고, 마침 집에서 가까운 청송 교도소를 염두에 두고 1994년 교정직 공무원 시험을 거쳐 1995년 원하던 청송 교도소로 발령을 받았다.
처음 교도관 생활을 시작하면서 갈등도 많았다. 열악한 근무 환경도 그렇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야 하는 수용자들을 보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회의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그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끼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교도관의 현실은 그에게 그들의 악을 먼저 보게 만들었다. '구금과 교화'라는 교도관 직분의 양면에서 교화보다는 경계가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죄는 자신들이 짓고 고생은 그 가족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연히 화가 나는 적도 많았다. 재소자들이 그토록 열망해 마지않는 바깥세상에서 교도관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곱지 않았다. 교도소와 교도소 밖 세상을 왕래하면서 그 역시 그런 자신의 현실에 어느덧 익숙해져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자녀들에게 사소한 일로 훈계를 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통제와 지시'라는 교도소 생활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문득 선배 교도관들이 이직하는 경우 몸에 밴 교도소 생활에서 쉬 벗어나지 못해 사회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기 십상이더라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찾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 길을 교도소 밖 세상에서 찾았다.
남 교사는 교도소 근무 이외의 남는 시간을 봉사활동에 바치기로 했다. 남을 위한 헌신과 봉사를 통해서 보호에만 익숙해진 자신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도관으로서 당연한, 수용자들을 위한 교화활동에 더욱 매달릴 수도 있었지만 교도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굳어버린 체질을 바꿔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교도소 밖의 세상에서 자신을 돌이킬 필요가 있었다. 그 길이 넓게 보아서 교도관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조금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더불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온전한 자부심을 되찾는 길이기도 했다.
그는 우선 사진 봉사를 시작했다. 사진은 그에게 이미 오랜 내력이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날이면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빌려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주던 것을 시작으로 일찍부터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그였다. 대학시절에는 웨딩촬영을 거들며 돈 들이지 않고 사진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군 생활 3년 동안 꼬박 모은 돈으로 전역하면서 FM-2라는 고급 기종을 마련한 적도 있었다. 교도관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가까운 주산 저수지로 나가 작품을 찍기도 했다. 그는 주변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새 출발을 하려는 신혼부부들을 위해 무료로 웨딩사진도 찍어주고 어르신들을 위한 영정사진도 찍어주었다. 소내 정서 순화를 위해 게시용 사진을 기증하기도 했고 교정대상전에 출품해 상을 받기도 했다.
다음으로 택한 것이 음악 봉사였다. 그는 취미삼아 3년 동안 배운 색소폰 실력을 무기로 동호인들을 끌어모아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며 음악회를 열었다. 청송은 물론 안동과 영양, 봉화, 멀리 영덕과 울진까지 마다않고 달려갔다. 수용자들을 위한 음악회도 생각해보았지만 우선 그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터였다. 거의 매일 보다시피하는 시커먼 교도관보다는 외부, 그것도 나긋한 여성 공연자들이 낀 무대를 바라는 건 눈에 보지 않아도 뻔한 이치지 않은가. 그는 요즘 모두 7개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 군데서 1년에 두 번씩만 활동한다고 쳐도 기본으로 매달 2회 이상 활동하는 셈이다.
부친이 운영하고 있는 과수 농장 일을 거드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요즘 같은 사과 수확철이면 일손은 더욱 바빠진다. 수확뿐 아니라 주왕산 입구에 있는 두 개의 간이매장에서 사과를 판매하는 일도 자신과 아내의 몫이다. 봉사나 집안일이나 어느 것 하나 부지런과 열성이 없으면 공직 수행과 병행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아무튼 그는 열심히 산다. 하루 4~5시간밖에 자지 못할 때도 많지만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비번인 날이면 새벽 일찍 카메라를 메고 주산 저수지로 나간다.
동틀 무렵의 주산 저수지는 고요하다. 몇 백 년 묵은 왕버드나무들은 물 속에 뿌리를 드리운 채 의연히 서 있다. 그 고요함이, 그 의연함이 남 교사에게 삶의 길을 가르쳐준다. 그 길은 자칫 그악스럽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과 사람에 대한 받아들임을 버리지 않는 길이다. 문득 청송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이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에게 보냈다는 편지글이 떠오른다. 무기수인 신창원은 2002년 이해인 수녀가 자신의 시집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을 보내준 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수십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맺어왔다고 한다.
이모님께. 새장 같은 공간,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고 압박감, 나약한 의지를 어찌할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절망하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바삐 날아온 사랑이 있었습니다. 꼬물꼬물 길게 늘어진 날필을 해독할 수 없어 암호를 풀 듯 30분을 매달려야만 했지요. 35년이 흘러 지금은 희미해져버린 어머니의 향기 그리고 요람 같은 포근한 가슴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홍역을 앓듯 마음의 몸살을 앓을 때면 마치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한 걸음에 달려오셨지요.
"사랑해요. 창원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알죠? 우리 모두 기도하며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요." 이모님은 때론 어머님처럼, 때론 친구처럼 그렇게 그렇게 저의 공간을 방문하여 손을 내미셨습니다. 마을 중앙에서 두 팔 벌린 당산나무 같은 이모님.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막아 삶에 지친 영혼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수호수.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내리 사랑만 베푸시다 지금은 알을 품은 펭귄의 헤진 가슴으로 홀로 추운 겨울을 맞고 계시는군요.
처음 이모님의 병상 소식을 접했을 땐 눈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울지 않아요. 걱정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해빙이 되고 들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밝게 웃으시며 풍성한 품으로 절 부르실 걸 알기에 조용히 조용히 봄을 기다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2008년 9월, 푸른 솔밭에서.
↑ 새벽 주산저수지.
↑ 그는 사과매장 한쪽에 연습실을 마련해놓고 틈틈이 색소폰을 연주한다.
↑ <경향신문>
교도관. 공안 직군 중 교정직이 직렬인 공무원(네이버 백과사전). 아마도 공무원 중 교도관처럼 험한 직군도 드물 것이다. 육체적 고역도 고역이지만 정신적 긴장에서, 특히 그 질에서 험하기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게다가 사회의 부정적 인식까지 끊임없이 그들을 괴롭힌다.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현저히 늘어나면서 교도관들은 거꾸로 비뚤어진 인권의식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수용자들로부터 인권침해를 빌미로 툭하면 진정과 고소, 고발을 당하기 일쑤고, 심지어 수용자들의 무차별적인 폭행에 시달리기까지 한다. 통계에 따르면 2003년부터 지난 8월까지 수용자가 교도관을 폭행하는 사건이 551건이나 발생해 593명의 교도관이 피해를 입었으며, 2004년에는 교도관이 수용자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까지 있었다.
남 교사(교정직 8급)가 교도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부친의 강력한 권유 때문이다. 청송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청송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한때 일본에 체류하면서 관광산업에 종사할 꿈을 꾸기도 했으나 유교적 완고함을 지닌 부친은 장남인 그가 공직에 진출하기를 바랐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공직에 들어갈 길을 찾게 되었고, 마침 집에서 가까운 청송 교도소를 염두에 두고 1994년 교정직 공무원 시험을 거쳐 1995년 원하던 청송 교도소로 발령을 받았다.
처음 교도관 생활을 시작하면서 갈등도 많았다. 열악한 근무 환경도 그렇지만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야 하는 수용자들을 보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회의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그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끼지 않은 바는 아니었지만 교도관의 현실은 그에게 그들의 악을 먼저 보게 만들었다. '구금과 교화'라는 교도관 직분의 양면에서 교화보다는 경계가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죄는 자신들이 짓고 고생은 그 가족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연히 화가 나는 적도 많았다. 재소자들이 그토록 열망해 마지않는 바깥세상에서 교도관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곱지 않았다. 교도소와 교도소 밖 세상을 왕래하면서 그 역시 그런 자신의 현실에 어느덧 익숙해져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자녀들에게 사소한 일로 훈계를 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통제와 지시'라는 교도소 생활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문득 선배 교도관들이 이직하는 경우 몸에 밴 교도소 생활에서 쉬 벗어나지 못해 사회에 적응하는 데 실패하기 십상이더라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그로 하여금 스스로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찾도록 만들었다. 그는 그 길을 교도소 밖 세상에서 찾았다.
남 교사는 교도소 근무 이외의 남는 시간을 봉사활동에 바치기로 했다. 남을 위한 헌신과 봉사를 통해서 보호에만 익숙해진 자신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도관으로서 당연한, 수용자들을 위한 교화활동에 더욱 매달릴 수도 있었지만 교도소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굳어버린 체질을 바꿔나가기 위해서는 우선 교도소 밖의 세상에서 자신을 돌이킬 필요가 있었다. 그 길이 넓게 보아서 교도관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조금이나마 개선시킬 수 있는 길이기도 했고, 더불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온전한 자부심을 되찾는 길이기도 했다.
그는 우선 사진 봉사를 시작했다. 사진은 그에게 이미 오랜 내력이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날이면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빌려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주던 것을 시작으로 일찍부터 사진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그였다. 대학시절에는 웨딩촬영을 거들며 돈 들이지 않고 사진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군 생활 3년 동안 꼬박 모은 돈으로 전역하면서 FM-2라는 고급 기종을 마련한 적도 있었다. 교도관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가까운 주산 저수지로 나가 작품을 찍기도 했다. 그는 주변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새 출발을 하려는 신혼부부들을 위해 무료로 웨딩사진도 찍어주고 어르신들을 위한 영정사진도 찍어주었다. 소내 정서 순화를 위해 게시용 사진을 기증하기도 했고 교정대상전에 출품해 상을 받기도 했다.
다음으로 택한 것이 음악 봉사였다. 그는 취미삼아 3년 동안 배운 색소폰 실력을 무기로 동호인들을 끌어모아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며 음악회를 열었다. 청송은 물론 안동과 영양, 봉화, 멀리 영덕과 울진까지 마다않고 달려갔다. 수용자들을 위한 음악회도 생각해보았지만 우선 그들이 별로 달가워하지 않을 터였다. 거의 매일 보다시피하는 시커먼 교도관보다는 외부, 그것도 나긋한 여성 공연자들이 낀 무대를 바라는 건 눈에 보지 않아도 뻔한 이치지 않은가. 그는 요즘 모두 7개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한 군데서 1년에 두 번씩만 활동한다고 쳐도 기본으로 매달 2회 이상 활동하는 셈이다.
부친이 운영하고 있는 과수 농장 일을 거드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요즘 같은 사과 수확철이면 일손은 더욱 바빠진다. 수확뿐 아니라 주왕산 입구에 있는 두 개의 간이매장에서 사과를 판매하는 일도 자신과 아내의 몫이다. 봉사나 집안일이나 어느 것 하나 부지런과 열성이 없으면 공직 수행과 병행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아무튼 그는 열심히 산다. 하루 4~5시간밖에 자지 못할 때도 많지만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비번인 날이면 새벽 일찍 카메라를 메고 주산 저수지로 나간다.
동틀 무렵의 주산 저수지는 고요하다. 몇 백 년 묵은 왕버드나무들은 물 속에 뿌리를 드리운 채 의연히 서 있다. 그 고요함이, 그 의연함이 남 교사에게 삶의 길을 가르쳐준다. 그 길은 자칫 그악스럽기 쉬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내면과 사람에 대한 받아들임을 버리지 않는 길이다. 문득 청송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이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에게 보냈다는 편지글이 떠오른다. 무기수인 신창원은 2002년 이해인 수녀가 자신의 시집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 을 보내준 것을 시작으로 그동안 수십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맺어왔다고 한다.
이모님께. 새장 같은 공간, 그리고 온몸을 짓누르고 압박감, 나약한 의지를 어찌할 수 없는 장벽 앞에서 절망하며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을 때, 바삐 날아온 사랑이 있었습니다. 꼬물꼬물 길게 늘어진 날필을 해독할 수 없어 암호를 풀 듯 30분을 매달려야만 했지요. 35년이 흘러 지금은 희미해져버린 어머니의 향기 그리고 요람 같은 포근한 가슴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홍역을 앓듯 마음의 몸살을 앓을 때면 마치 곁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처럼 한 걸음에 달려오셨지요.
"사랑해요. 창원이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알죠? 우리 모두 기도하며 응원하고 있으니까 힘내요." 이모님은 때론 어머님처럼, 때론 친구처럼 그렇게 그렇게 저의 공간을 방문하여 손을 내미셨습니다. 마을 중앙에서 두 팔 벌린 당산나무 같은 이모님. 따가운 햇살을 온몸으로 막아 삶에 지친 영혼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수호수.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내리 사랑만 베푸시다 지금은 알을 품은 펭귄의 헤진 가슴으로 홀로 추운 겨울을 맞고 계시는군요.
처음 이모님의 병상 소식을 접했을 땐 눈물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울지 않아요. 걱정도 하지 않을 겁니다. 해빙이 되고 들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밝게 웃으시며 풍성한 품으로 절 부르실 걸 알기에 조용히 조용히 봄을 기다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2008년 9월, 푸른 솔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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