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월 말, 서울 동부지검 형사5부 이유선(35) 검사 방으로 팩스가 도착했다. 일주일 전 금융기관에 요청했던 계좌추적 자료였다. 서류를 받아든 여검사의 눈이 순간 번쩍 뜨였다. “아, 이젠 됐다!” 이 검사는 회사 돈 28억원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여덟 번째 고소를 당한 컴퓨터시스템 설계업체인 C정보시스템 전 대표이사 한모(56)씨 사건에 석 달째 매달리는 중이었다.
이유선 검사가 수북이 쌓여 있는 사건 관련 서류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 검사는 이 서류더미 속에서 일주일에 나흘씩 야근을 해가며 끈질기게 추적한 끝에 한씨의 혐의를 입증할 수 있었다.
이날 이 검사가 받아든 계좌추적 자료에는 한씨가 거래처 계좌를 차명으로 이용해 회사 돈을 빼돌린 뒤 몰래 사채를 갚은 입출금 내역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횡령액은 당초 접수된 액수의 2배가 넘는 61억원에 달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앞서 7차례나 무혐의 처리된 사건이었지만 분명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거든요.”
계좌추적 영장 청구만 두 차례, 4살배기 아들을 떼어놓고 일주일에 나흘씩 야근을 해가며 3개월간 70여 개의 계좌를 샅샅이 훑어온 이 검사의 노력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한씨는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뒤 횡령과 배임 등 혐의로 2008년 5월부터 회사 관계자들에게서 7차례나 고소를 당했지만 매번 무혐의 또는 각하 처분을 받았다. 한씨가 번번이 “내 명의로 회사에 입금한 자금이 빼간 자금보다 많다”고 한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씨가 제출한 본인과 회사 명의 계좌의 입출금 내역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8번째 고소된 사건을 받아 든 이 검사는 꼼꼼히 살펴보던 중 “너무나 당연한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회사 인수자금도 없었던 사람이 사채를 수십억원씩 끌어다 쓴 뒤처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분명 ‘뭔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죠.” 회사 내부인들이 번갈아 가며 지속적으로 고소를 한다는 점도 이 검사의 수사 욕구를 불렀다.
그는 두 명의 수사관과 함께 관련 계좌를 모조리 찾아내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조사받은 적이 없는 사채업자 등 참고인도 10명 넘게 불러들였다. “계좌추적 내역과 참고인 진술을 종합한 결과 한씨가 회사에 입금했다고 주장한 돈은 전 대표이사에게 내준 경영권 양수대금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어요. 회사 돈을 몰래 빼내서 개인 사채를 갚은 증거도 확보됐고요.” 여검사 한 명이 5개월 넘게 매달린 결과 앞서 다른 검사들이 찾지 못한 혐의점을 밝혀낸 것이다.
구속영장 청구를 일주일 앞둔 지난달 15일, 이 검사는 피고소인 한씨를 처음 만났다. 고소인과 참고인 2명을 부른 대질조사 자리에서였다. “내가 회사에 넣은 돈이 가지고 나온 돈보다 더 많습니다.” 한씨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동안 했던 변명을 되풀이했다. 이 검사의 다그침에도 한씨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증권사 지점장 출신으로 다른 회사 인수작업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던 한씨였다. 이 검사는 그 앞에 차명계좌 추적 내역을 들이밀었다. “검사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무기는 치밀하게 확보된 증거뿐이거든요.” 다음 날까지 이어진 조사에서 한씨는 혐의 대부분을 자백했다.
이 검사는 결국 한씨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2007년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코스닥 등록업체를 인수해 회사 돈 61억원을 횡령하고 회사 소유 주식 100만 주(시가 48억원 상당)와 42억원의 회사 소유 약속어음 등을 사채업자에게 담보로 제공한 혐의다. 조사 결과 한씨는 채 1억원도 되지 않는 자기 자본만 갖고 사채업자에게 빌린 90억원 등을 합쳐 회사를 인수한 뒤 사채를 갚으려고 다시 회사 자금과 주식 등을 빼돌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검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2002년 44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동부지검 형사3부, 공판부를 거쳐 지난해 2월 금융수사를 전담하는 형사 5부에 배치됐다. 그는 “주말에 매달리는 아이를 떼어놓고 출근 할때마다 마음이 아프다”면서도 “소액 투자자들을 울리고 시장질서를 교란시키는 경제사범들에 대한 수사를 계속할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