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은 완벽한 증거인멸
앞에 예로 든 "억울하다"는 유언이나 재심청구사유는 그들의 죽음을 막아 주지는 못했다.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져 사형수가 살아난 예는 드물다. 너무나 엄격한 재심절차에 대해선 뒤에 따로 자세히 다를 생각이지만 '억울한 사형'의 개연성은 우리 주변의 도처에 있다. 1심이나 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가 2심이나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사건이 많고, 진범이 잡혀 억울한 살인누명이 벗겨지는 사건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 그 개연성을 입증하며, "억울하다"는 유언과 재심청구서가 그런 개연성을 보강하고 있다.
그럼에도 억울한 사형집행이 입증된 예는 단 한 건도 없다. 그것은 억울한 사형이 없어서가 아니라. 억울한 사형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증거 중에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사형수 본인이다. 사형수란 존재는 그 자체로서 유력한 증거물이다. 사형집행은 그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일 수가 있다. 억울한 사형수가 사라짐으로써 그 억울함을 증명할 방법도 함께 없어지는 것이다. 사형수가 "억울하게 죽는다"고 주장하는 이유 중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은 자수가 체포로 조작됐다는 주장이다.
"목 좀 편하게 해줘요"
사형집행장에서 사형수가 돗자리 위에 앉은 채로 유언을 끝내면 교인의 경우, 이어서 예배가 진행된다. 사형수는 거개가 종교를 믿기에 집례를 안 받는 것이 오히려 예외다. 신부나 목사는 사형수에게 다가가 교화 담당 직원과 함께 기도, 성경봉독, 찬송가 합창을 한다. 불교의식은 스님의 독경으로만 진행돼 빨리 끝난다. 성직자들은 거개가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사형수가 오히려 성직자를 위로하기도 한다. 집례는 사형수를 안정시켜 양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특히 찬송합창이 그런 신경안정제 구실을 한다. 찬송소리가 작은 사형수에겐 "크게 부르라"고 옆에서 부추기기도 한다. 설교 내용은 한결같이 하느님께서 이승의 죄를 사해 주셨으니 천당은 당신 것이란 식이다. 보안직원들은 이 예배를 짧게 하여 집행을 빨리 하려고 하고, 교화를 맡은 직원들은, 성직자들이 그 말을 듣겠느냐고 반대하는 일도 있다. 예배시간을 단축하는 길은 찬송가 곡목을 줄이는 것뿐이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찬송가는 세 곡목을 넘지 않고, 2절까지만 부르는 일이 많다고 한다.
집행의 신호는 예배에 참여한 교무간부가 손짓으로 한다. 그 손짓을 보고 단상의 집행관이 손짓으로 집행 명령을 내린다. 사형수 뒤에 서 있던 3명좌 연출조 중 가운데 사람이 먼저 용수를 뒤집어 씌운다. 하얀 용수는 가슴까지 내려온다. 나머지 2명은 들고 있던 포승으로 사형수의 발목과 무릎을 묶고 두 팔을 겨드랑이에 꼭 붙여 묶는다. 항문을 막아 배설물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고자 밧줄 한 가닥을 사타구니 밑으로 뽑아서 손에 찬 쇠고랑을 거쳐 발목에 잡아 맨다. 이때 "아파요. 좀 풀어줘요"라고 말하는 사형수도 있다.
다 묶으면 가운 데 사람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사형수를 비스듬히 뒤로 끌고 간다. 이때 계속해서 주기도문을 외거나 찬송가를 부르는 사형수도 있고, 발버둥치는 이도 있다. 다른 연출조 직원이 뒷 쪽으로 다가가 흰 커튼을 옆으로 드르륵 당겨 열어 젖힌다. 여기가 교수장이다. 이 교수장은 집행장 뒷쪽에 따로 만든 별실인 데, 3면의 베니아판 벽은 천장까지 닿아 있고 한쪽은 커튼으로 닫혀져 있다.
커튼을 열고 사형수를 끌고 가 사방으로 금이 나 있는 직사각형 판자 위에 앉힌다. 천장의 도르래에서 늘어뜨려져 있는 밧줄 올가미를 잡아당겨 사형수의 목에 건다. 이 밧줄은 천장에 달린 두 개의 도르래를 겹돌아 남쪽의 별실 벽 뒤에 있는 포인트의 쇠고리에 연결돼 있다. 이 올가미를 걸 때도 순간적인 고통을 못 참아 "목 좀 편하게 해줘요"라고 말하는 사형수도 있다. 이 순간이야말로 이승 최후의 시점이다. 드디어 벼랑 취에 선 것이다. 못다 한 말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다.
비켜! 제껴! 쾅…쇠…
춘천호 토막살해 사건의 범인 임동원씨는 무슨 생각이 났던지 낯익은 직원에게 농담조로 "나는 ×× 때문에 죽으니 당신들도 조심해"라고 내뱉았다. 그 말을 들은 한 직원은 그뒤 몇 달 동안 '발기불능'이 돼버렸다. 친어머니를 죽인 어느 사형수는 "아이구 어머니, 어머니" 하고 부르다가 지하로 떨어졌다. "그래 내가 정말 죽는 거요? 죄 없는 내가 죽어서는 안되는데, 안되는데…" 이러다가 떨어진 사형수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개를 떨구고 있던 어느 사형수는 목에 올가미가 걸리자 고개를 벌떡 들면서 무엇을 잊은 듯 '이이 참' 하다가 더 말을 잇지도 못하고 "꽝" 떨어져 매달렸다. 목에 올가미를 건 두 연출조 직원이 사형수에게 남기는 인사말이 있다. "잘 가!" 그러고는 네모 판자를 재빨리 벗어나면서 "비켜 !" "제껴!"라고 연달아 소리친다. 이미 한 연출조 직원은 별실 뒷쪽으로 돌아 별실 외벽에 붙어 있는 포인트란 손잡이를 잡고 기다리고 있다.
"제껴!"란 소리와 함께 그는 손잡이를 잡아 당긴다. 네모 난 마루청이 푹 꺼지면서 지하광의 벽을 "꽝"친다. 동시에 사형수의 몸은 지하로 떨어지면서 밧줄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비명은 보통 없다. 최은수, 주영형씨 등 몇 몇 기독교 사형수들은 떨어지기 직전 "주여!"라고 최후의 외침을 남기기도 했다. "꽝" 소리가 나기 직전에 집행관을 비롯한 참여 직원들은 서둘러 형장 바깥으로 나가 버린다.
지하로 떨어진 사형수의 몸은 핑그르 돌면서 1분쯤 흔들흔들 하다가 정지한다. 잠시 그 몸이 퍼득퍼득 경련한다. 어깨와 목을 추스리기도 하지만 미동일 뿐이다. 교무간부, 담당직원, 목사(또는 신부) 등 세 명은 뻥 뚫린 구멍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주기도문을 왼다.
"지금 의식이 있어. 기도를 들을 거야. 이 시간이 가장 중요해."
성직자가 그런 말을 하면서 독려하기도 한다. 교수형을 목격한 경험이 적은 사람일수록 이빨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낼 만큼 덜덜 떤다. 그래서 찬송가를 더 힘차게 부른다.
쇳, 쇠 하는 소리, 즉 목 졸리는 사형수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찬송이나 기도 소리 사이로 간간이 들려온다. 그 소리를 안 들으려고 더욱 목청을 높인다. 달아나듯 형장을 빠져나간 입회인들은 느티나무 주위에 모여 담배를 피워 문다. 사형수 4백여 명의 천주교 대부(代父)였던 고중렬씨는 마루청이 둘러빠진 구멍 바로 옆에 앉아 수첩만한 '성교 예규'를 꺼내 임종경을 큰 소리로 꼭 읽어갔다고 한다. 대자(代子)의 몸뚱이가 매달린 것을 내려다보면서
"예수는 나를 구하소서. 예수는 나를 구하소서. 천주여 내 영혼을 거두소서. 성모 마리아는 날 위하여 빌으소서…."
이렇게 경을 외는 소리를 죽어 가는 사형수가 알아듣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고씨는 말한다. 죽어갈 때 청각이 가장 오래 살아 남아 있는 것 같더란 것이다. 고씨의 독경은 사형수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된다. 고씨는 사형수의 운명 순간을 언제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운명 직전에는 반드시 발끝이 파르르 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긴장상태의 몸 속에서 무엇이 빠져나가는 듯 몸뚱이가 축 아래로 쳐져 버린다는 것이다.
30분간 매달아 놓아
교수형이 모든 사형 방법 가운데서 고통이 가장 적다는 데는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교살일 경우 시체부검을 해보면, 사정의 흔적이 발견되는 예가 많다. 그래서 교수형에 처해진 사형수가 황홀경 속에서 간다는 얘기를 하는 이도 있으나, '죽어 본'사람이 없으므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심장이 멎는 것을 죽음으로 정의할 때 교수형의 경우 평균 사망시간은 교수시작으로부터 14분쯤이라는 것이 일본측 통계다. 개인차가 많아 최단 4분 35초, 최장 37분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어느 퇴직 교도소장도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14, 5분이더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선 매단지 약 20분이 지나면 일단 시체를 끌어올린다. 상체가 마루청 위로 드러날 정도로 끌어 올려 놓으면 의무관이 와서 사형수의 가슴을 풀고 청진기를 갖다 댄다. 사망을 확인한 뒤에는 다시 지하로 늘어 뜨려 5분 이상 더 달아 두었다가 시체가 된 사형수를 풀어 놓는다. 이는 행형법 164조의 "사상을 검시하고 5분이 지나지 않으면 교승을 풀지 못한다"는 규정에 따른 것이다. 달려 있는 총시간은 30분쯤이다.
사망진단서에는 '형사'(刑死)라고 쓴다. 밧줄에 매달렸을 때 사형수의 발은 기차 바닥에서 약 40센터미터쯤 공증에 떠 있다. 연출조 3명은 실내 계단을 통해 지하실로 내려가 시체를 풀어 그냥 바닥에 눕혀 둔다. 교수형에 처해진 시체의 외상은 목의 밧줄 감겼던 자국이 가장 두드러진다. 떨어지는 충격으로 밧줄이 목을 홱 휘감아 지나간 마찰력으로 시커멓게 피멍이 나 있다. 자동차의 스키드 마크 같다.
혀도 입 사이로 빠져 나오고 눈알도 약간 튀어나온다. 그밖에 출혈은 없는 게 보통이다. 눈알이 튀어나오는 것을 막으려면 안대를 씌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김재규와 그의 하수인에게만은 안대를 씌워준 뒤 집행했다. 교무직원들은 구멍 앞에서 몇 분간 찬송과 기도를 올리고는 곧장 사무실로 돌아온다. 사무실에서는 미리 연락을 받고 달려온 천주교, 신교, 불교의 신앙자매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들에게 직원들은 "×××는 아주 편안히 갔습니다"고 말해준다. 이때만은 종교간의 구별이 없이 한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한 30분쯤 쉰 직원들은 다음 번 차례를 위해 다시 집행장으로 향한다. 사형수들이 가끔 눈이나 콩팥을 기증하여 기사거리가 되곤 한다. 눈은 사망시간이 상당히 지난 뒤에 떼어 내도 손상이 없으므로 별 문제가 없다. 콩팥은 사망한 지 20분쯤만 지나면 급속도로 손상되기 시작한다. 사형집행의 관례상 30분 이상 매달아두어야 하므로 콩팥이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 이 문제로 이식수술을 맡을 외부의사와 사망진단을 내리는 의사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시간이 너무 지난 콩팥을 이식 받을 경우 환자가 부작용으로 죽을 수도 있다.
콩팥기증을 약속한 사형수가 죽으면 시체를 즉시 교도소 의무실로 운반한다. 거기서 콩팥을 떼낸다. 사전에 서울시내의 콩팥 관계 환자들 중 이식수술을 받을 만한 사람들을 여러 명 후보로 뽑아 비상대기시켜 둔다. 사형수 체질을 검사하여 그것을 이식받아도 거부반응이 적을 것 같은, 여러 가지로 소질이 비슷한 환자에게 이식수술을 해주는 것이다.
너무 굵어 고통 심한 밧줄
지금도 쓰이는 서울구치소의 교수용 밧줄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제시대부터 있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다른 이들은 해방 뒤부터 쓰여진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40여년간 이 밧줄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 갔다. 김재규·문세광·박선호·김대두·박철웅·주영형·조봉암·황태성·이수근·조용수·최인규 등등 희대의 살인마와 좌절한 정치인, 실패한 암살자, 간첩 등이 이 밧줄에 매달려 생을 마감했다. 앞으로 또 누구의, 얼마나 많은 생명을 앗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이 밧줄은 마닐라 삼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올가미 부분은 그 수많은 목에서 베어나온 지방성분과 피가묻어 새카맣게 반들반들하다고 한다. 고중렬씨는 『서울구치소』란 저서의 끝에서 이런 실토를 했다.
…또 한가지는 밧줄이다. 일제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밧줄은 그 굵기가 젊은이의 팔목 정도라서 목에 걸치고 매달리게 되면 쉽사리 숨이 넘어가지 않는다. 차라리 떠나보내야 할 바에는 가느다란 로프를 사용해 긴 고통 없이 보내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한다. 몇몇 담당자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누가 건의하려 들지 않았고, 그러다 그 직을 물러 나왔다. 언제나 이 안타까운 실정은 해소되려는지…
고씨가 안타까운 호소를 한 지 8년이 흘렀지만 그 밧줄은 그대로다. 사형장의 기구는 교체되는 법이 없다. 바꿔 끼우면 구치소장에게 재앙이 온다는 미신 때문이란 얘기도 있다. 지방의 어느 교도소에선 교수용 밧줄이 끊어져 사형수가 지하실 바닥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형수는 비몽사몽간에 "여기가 지옥이냐, 천당이냐"고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서둘러 밧줄을 잇고, 올가미를 늘어뜨려 지하에서 다시 목에 걸어 끌어 달아 올리는 방법으로 교수형에 처했다는 것이다. 서울구치소에선 옛날에 밧줄 길이를 잘못 잡아 떨어진 사형수가 매달리지 못하고 지하실 바닥에 부딪쳐 부랴부랴 끌어올려 집행한 적도 있었다. 봉건시대에는 사형집행의 실수로 생존한 사형수는 특별 사면해 주는 관습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돼 있었다. 두 번 죽일 수는 없다는 배려에서였다.
올가미 벗겨져, 두 번 죽은 사형수
몇 년 전 어느 형장에서 있었던 밧줄 사고는 좀더 확실하다. 어느 가냘픈 청년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고 포인트를 잡아당겼더니 사형수의 몸이 지하로 떨어질 때 밧줄이 그만 벗겨지고 말았다. "쿵"소리와 항께 사형수는 높이가 4미터쯤 되는 지하실 바닥에 낙하, 머리가 터지고 피가 튀었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 직원들이 지하로 뛰어 내러가고, "밧줄 내려!"라는 부르짖음이 들렸다.
지하로 밧줄을 잡아당겨 지하에서 사형수의 목에 밧줄을 걸고는 밧줄을 당겨 올려 사형을 집행했다. 집행인측에선 가족들이 시신을 확인하고 항의를 할까봐 겁을 냈다. 그래서 다음날 새벽, 관을 뜯고 사형수의 시체를 끄집어 내 머리와 가슴에서 피를 닦고 광목으로 싼 뒤 다시 입관시켰다. 그날 오후 이 관을 인수한 유족은 관 뚜껑을 열었으나 사고를 눈치채지 못했었다고 한다. 이 사형수의 이름을 밝히면 그 가족들이 마음 아플 것 같아 덮어 두겠지만,
"개 잡는 듯한…"이란 표현이 직원들로부터 안 나오도록 법무장관은 제발 띠 밧줄을 현대화하여 이왕 보내야 할 사랑이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보내야 할 것이 아닌가. 두 번 죽은 이 사형수의 고통은 무엇으로 갚을 수 있을까. 기분은 나쁘겠지만, 사형을 명령하고 사형을 선고하는 분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서울구치소의 포인트, 즉 잡아당기면 마루판이 꺼지고 사형수가 지하로 떨어지도록 하는 손잡이 (교수형장의 외벽에 붙어 있음)가 고장나도 고쳐주지 않아, 직원은 손잡이를 잡아당긴 채 두 발을 벽면에다가 갖다 대고 벽을 밀어 붙이면서 사형수의 몸뚱이와 함께 시소처럼 30분간 매달려 있어야 한다. 어른이 그런 모습으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사형반대론을 편 서울대 김철수 교수는 "…사형제도는 사형을 당하는 죄수의 생명권의 침해일 뿐 아니라 사형집행인이라든가 사형선고인, 사형집행 확인인 등의 인간의 존엄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신헌법학개론』). 유언을 가족에게 전달도 않거나 적당히 알리고 진행을 서둘러 유언조차 못하게 하는 일, 그리고 이런 밧줄, 이런 포인트가 바로 사형을 집행하는 측이나 당하는 측, 쌍방의 인간존엄성을 함께 더럽히는 것이리라.
집행인들 가운데 사형반대자 많아
사형이 차례로 집행됨에 따라 지하실 바닥엔 시체들이 나란히 놓이게 된다. 옛날(5, 60년대)엔 하루에 20명까지도 집행했지만 요즘은 한 번에 5∼7명씩 집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한 명당 30분에서 1시간씩 걸린다. 집행이 끝나면 직원들은 관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 시체를 입관시킨다. 이때 비로소 수정을 푼다. 사형 구형 뒤부터 사형수의 벗이 되었던 쇠붙이는 시체가 된 그와 헤어지는 것이다. 직원들은 수의의 수인번호와 용수에 적힌 수인번호를 대조한 뒤 시체를 넣은 다음 백묵으로 관 위에다가 번호를 적어 놓는다. 옷은 갈아 입히지 않고 얼굴만 닦는다.
관은 꼭 일곱 마디로 묶는다. 예산 사정이겠지만 관을 너무 허술하거나 작게 만드는 일도 있다. 이팔국씨는 몸이 장대하여 관이 옆으로 터져 버렸다. 입관이 끝나면 관들을 집행장(1층) 마루로 들어 올린다. 쥐나 벌레 등 잡것이 침범하지 못하게끔 철망을 씌운 뒤 그날 밤을 보내게 한다. 당직을 따로 두지는 않는다. 집행장 바로 옆에 망루가 있기 때문이다. 이날 밤 그곳에서 보초 서는 사람들은 사색이 된다.
1982년, 83년처럼 한여름에 집행이 있었을 때에는 시체가 썩어 그 냄새가 현장 부근에 진동하였다고 한다. 구치소 직원들이나 성직자들은 무슨 급박한 일이 있다고 복중에 집행을 하느냐고 불평이 대단했다.
사형수 1인당 집행비용은 12만 원이다. 집행이 끝나면 돈이 기만 원 정도 남는다. 이 남은 돈으로 가난한 사형수의 뒤치다꺼리도 하고 그래도 남으면 술값으로 쓴다. 사형집행에 참여한 직원들에겐 오후에 자유시간을 준다. 집행이 끝났을 때 참여 직원들은 눈에 핏발이 서는 등 제정신이 아니다. 이들은 서둘러 구치소 근처의 술집으로 몰려간다. 깡소주만 1, 2, 3차로 밤새도록 퍼 마신다. 거의가 집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 전날 밤에도 잠을 못 이룬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도.
아무리 합법적인, 또 사회정의를 위한 '살인'이라 해도, 그들의 손에 의해 죽어간 사형수들은 오랫동안 부대끼면서 정이 들었던 얼굴들이다. 고중렬씨 같은 고참들도 "사람이 참으로 선하게 되었을 때 죽여야 한다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했다. 더구나 형장에서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긴 사형수가 있다든지, 옆에서 아무리 지켜봐도 무고한 것 같던 사람이 끈질긴 구명의 몸부림도 소용이 없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을 땐, 법의 정의를 세운다는 보람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어느 사형집행인은 집행 뒤의 소감을 "한마디로 미친 짓 한 거지요"라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열렬한 사형반대론자들은 사형집행인이다.
신앙은 일종의 마취제인가
매주 사형수를 만나 교화에 힘썼던 여신도들 중에는 "편안히 갔다"는 목격담을 듣고 자랑이나 보람만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사형수 교화라는 것은, 결국 사형수가 소동을 부리지 않고 죽어가도록 만드는 일종의 마취제가 아닌가"하고 회의하는 여신도들도 더러 있다. 특히 사형수가 억울하다고 발버둥칠 때, "나는 법률적인 것은 상관 않겠다"는 입장에서 "죽음을 받아들여라"는 말로써 신앙만 심어주려 해서 되겠느냐, 하는 의문을 많이 가졌던 사람일수록 "양순하게 갔다"는 의미를 되씹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사형수의 사체는 집행된 지 24시간이 지나야만 유족에게 넘겨주게끔 돼 있다. 사형수의 시체는 정문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물자, 쌀, 쓰레기 등을 들여오는 통용문을 통해서, 유족이 가지고 온 영구차가 들어오도록 돼 있다." …정히 인수한다"는 인수증에 도장을 찍어 주고 시체를 인수한 가족은 정비공장쪽으로 통하는 후문으로 빠져 나가야 한다. 이때 유족의 태도는 갖가지다. 죄스럽고 부끄러워 조용히 왔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가족이 있고, "죄 없는 내 자식 왜 죽였어"라고 호통을 친 사람도 있다. 아들의 악행에 대한 책임감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아예 드러누워 악에 바치는 저주를 하여, "사형수는 역시 가정에서 만드는구나"는 소감을 불러 일으키는 강파른 유족도 있다.
가족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주소지로 전보를 쳤더니 "유일한 생존 가족은 90세 조모임. 중병에 걸려 누워 있음. 서울 갈 차비도 없다고 하니 사체는 적의 처리 바람"이란 동장의 답신이 날아 모기도 한다. 옛날엔 연고자 없는 사체는 벽제에 가매장했다. 요사이는 묻힐 곳이 없는 가난한 사형수를 위해선 교인들이 장지를 마련하여 장례식까지 대신 치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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