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마 농구 시기 ¶
경복고에서 1학년 때부터 198센티의 키로 팀의 주전 센터를 맡아 한 경기에 31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기도 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일찍부터 초고교급 선수로 주목을 받았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 198센티니 앞으로 더 크면 얼마나 굉장하겠냐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키는 결국 저때 키에서 하나도 안 컸다.)
대학은 고려대로 진학, 김병철과 함께 1학년 때부터 바로 팀의 주전을 꿰어 찬 후 센터와 파워포워드를 넘나들며 좋은 운동능력을 바탕으로 경기 중에 멋진 덩크까지 선사하며 활약했다. 하지만 연세대를 누르며 대학 최강 수준으로 팀을 이끌긴 했어도 농구대잔치에서 실업팀들을 상대로는 그렇게까지 압도적인 활약을 하지 못 했다.
2학년에 이르러 현주엽을 골밑 파트너로 받아들이면서 좀 더 전방위적인 멋진 활약을 하며 오빠 부대를 이끄는 대학 농구 스타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서장훈이 가세한 연세대 앞에 패배하고 만다.
3학년, 양희승 김병철 현주협과 함께 전희철은 서장훈이 여전히 강한 연세대를 대학 농구에서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농구대잔치에선 비록 정규시즌에는 연세대에게 패하며 시즌 2위였지만 내노라 하나는 실업팀들을 연파,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쥘 것만 같아 보였다. 플레이오프 상대는 앞선 시즌에 중앙대에게 패하며 이제 늙어 가는 걸로 보였던 허재 김유택 강동희에 부상에서 몇 년만에 겨우 회복한 한기범이 있던 기아자동차. 고려대가 기아를 물리치고 농구대잔치 결승전에 나가리라 예상한 사람이 많았지만 고려대는 패배하고 말았고, 패배의 원흉 중에는 전성기를 지난 김유택 앞에서 현주엽과 함께 정규 시즌의 위력을 보이지 못한 전희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4학년이 된 전희철은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과 함께 고려대 농구부를 거의 사기 수준의 강함으로 이끌면서 대학 농구를 제패했고, 농구대잔치 역시 정규시즌 전승의 위엄을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당연히 고려대는 농구대잔치 우승 후보 1순위였다. 하지만 또 한번 전희철과 현주엽을 비롯한 고려대 선수들은 허재 강동희 김유택 앞에서 정규 시즌의 위력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고, 무적이라던 전희철과 고려대는 기아자동차에게 허무하게 탈락하고 말았으며 그렇게 전희철의 아마 농구 시대는 끝났다.
1.2 실업에서 프로 시기 ¶
이미 프로화가 되는 게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전희철은 김병철과 함께 동양제과 농구팀에 지명되어 입단, 프로화를 앞두고 열릴 실업 리그인 코리안 리그에선 신생팀 동양을 우승시키며 화끈한 덩크까지 구사하는 등 맹활약을 보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출범한 KBL 원년, 교체 없이 풀타임으로 경기를 소화하다시피 하며 , 이 때문에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지만 전희철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음 시즌에 스탯은 18점대에 5.6 리바운드 정도로 줄었지만 그럼에도 팀을 다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시즌 후 전희철은 공익근무로 병역을 치렀다.
소집해제 후 맞이한 99-00시즌. 세계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도 유래가 적을 정도의 패배를 쌓았던 오리온스에 복귀한 전희철은, 하지만 팀이 중요한 고비를 맞이한 와중에 발목부상으로 이탈하는 일도 있었고, 팀을 플레이오프로 진출시키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00-01 시즌. 김병철까지 복귀하며 전희철은 비로소 오리온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외려 팀은 이전 시즌보다 더욱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고 말았으며, 전희철은 평균 15점 5리바운드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외국인 선수들로만 채워진 다른 팀들의 골밑을 공격하는데 버거워하는 모습도 보였고 또 한번 부상을 당하며 시즌 중에 전력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결국 팀을 나락에서 구해내지는 못 했다.
01-02시즌.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가 합류한 오리온스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지난날의 오욕을 털어냈다. 전희철은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를 오가며 14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 공신 중 한 명이 되었으나, 김승현과 힉스로 인해 좁아지는 자신의 팀 내 역할을 납득하지 못하고 시즌 후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KCC 이지스로 옮겨가게 된다.
02-03 시즌. 앞선 시즌에서 이른바 토탈 바스켓볼의 위용을 보인 KCC 이지스에 있어 골밑 공격과 외곽 공격이 전부 가능한 전희철의 합류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게 될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전희철은 KCC이지스의 복잡한 패턴 플레이에 전혀 적응 못 하고 그냥 3점 덜 들어가는 슈터로 전락, 평균 10점 2리바운드의 기록만 남겼고 팀은 나락에 빠졌다.
03-04 시즌. 시즌 초 팀에서 주전으로도 나오지 못하는 상황 속에 다시 트레이드를 요청, 조성원과 트레이드 되어 SK나이츠의 일원이 된 전희철은 평균 14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다음 시즌이 되면서 더더욱 강력한 외국인 선수들이 득세, 전희철은 평균 10점 4리바운드 정도만의 기록을 남기고 만다. 그 뒤 이런 저런 잔부상 속에 한 시즌이 넘어가면 갈수록 예전의 위력은 사라져 갔다.
07-08 시즌을 평균 3.7점 2.3 리바운드의 기록으로 끝내고 FA자격을 얻은 상태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려 했지만, 다른 팀들 중 전희철을 원하는 팀은 없었다. 원 소속팀인 SK나이츠에선 1억을 제시했지만 전희철은 1억 2천을 요구하며 제의를 거부, 현역에서 은퇴했다.
2 선수로서의 특징 ¶
스피드와 탄력이 한국 선수들 중에는 동급 최고 수준이었다. 이런 운등능력을 이용해 골밑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한 시즌에 평균 40퍼센트 확률로 3점슛을 넣은 일도 있을 정도로 슛 능력도 좋았다. 특히 중거리에서 넣는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는 전희철의 특기였다. 운동능력을 살린 덩크도 멋지게 잘 넣었으며, 리바운드 되는 공을 순산 집어넣은 팔로우업 덩크도 잘 했다.
한편으로는 골밑 몸싸움과 리바운드 같은 궂은일을 꺼린다는 비판도 대학 때부터 받았고, 팀플레이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좀 있었다. 지나치게 운동능력에 의존하며 공격 기술이 부족하단 비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L에서 골밑에 있는 외국인 선수가 한 명 뿐일 때는 훌륭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공익근무를 마친 후에는 잔부상 속에 이전에 비해 운동능력이 많이 줄어들었고, 그렇게 줄어든 운동능력과 외국인 선수들의 골밑 장악 속에 장점의 위력은 줄어들고 약점은 더욱 부각되어 가며 결국 위력을 잃어갔다.
원년 시즌의 활약과 이에 대비되는 이후 시즌의 모습들 때문에 KBL에서 외국인 선수 제도로 인한 희생양 하면 항상 꼽히는 선수. 한편으로는 공익근무 이후 급격히 늘어난 부상들 때문에 공익근무 당시 몸 관리가 부족했던 거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계속된 부상만 아니었다면 센터나 파워포워드가 아니라 스몰포워드로서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했을 수 있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3 국제 대회에서의 전희철 ¶
아시아권에서 항상 한국 팀의 벽이었던 중국전을 보면 파워 포워드로 나섰을 때는 딱히 팀플레이로 만들어내는 효과도 없고 중국의 상대 선수와 비교해 우위에 있는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수비 구멍만 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1997년 아시아선수권에서는 대표팀의 센터로 출전, 준결승에서 중국 팀을 상대로 이전에도 이후에도 보인 일이 없는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는 골밑 수비로 중국의 거대한 선수들과 맞서고, 센터 포지션임에도 정확한 외곽슛으로 중국팀의 센터를 끌어내 다른 한국 선수들이 골밑을 돌파할 공간을 만들고, 중국이 지역방어로 나오자 냅다 3점슛을 꽂아 비수를 꽂기까지 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중국전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일본을 상대한 결승전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보였으며, 한국 대표팀은 우승, 대회 MVP는 전희철의 몫이었다.
2002년 아시안 게임에선 스몰 포워드 자리로 출장, 중국 선수에게 밀리지 않는 높이로 외곽슛을 연달아 꽂으며 팀 승리의 공신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이렇게 전희철은 아시아 정상을 두 번이나 차지한 몇 안 되는 한국 선수 중 한명이 되었다.
4 기타 ¶
고려대 농구부에 있던 시절 박한 감독의 무작전 농구 때문에 술자리에서 제대로 작전 짜인 농구 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하지만 전희철은 작전 농구의 극한인 신선우 감독 밑에서 전혀 적응 못 하는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현역 은퇴 후 SK나이츠에서 2군 감독을 맡았다가, 1군 코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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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하위키에 전희철 항목 보다가 써넣은 내용.
김유택 앞에만 서면 전희철은 왜 작아지는가. 기아자동차의 지역방어 앞에 어리버리하던 전희철에 대한 기억이 선명.
1997년 ABC 대회에서 전희철 볼 때만 해도 전희철이 한국 농구 역사를 다시 쓸 줄만 알았건만.
그래도 중국 두 번 꺾고 두 번 아시아 1위 차지해본 선수가 전희철 말고는 진짜 별로 없으니. 보자, 1997년과 2002년 멤버 중에 겹치는 게 문경은 이상민 전희철 셋인가. 이중에 이상민은 2002년 중국전 활약은 미미했고, 문경은 역시 매한가지. 결국 1997년 2002년 두번에서 다 한국이 중국을 꺾는 데 공신 역할을 한 건 전희철 뿐.
KCC에 트레이드로 온 모 거물 선수가 팀 패턴에 전혀 적응 못하고 겉돈다던 기사들. 그 기사 나오던 시절에 KCC에 영입된 거물 선수는 전희철 뿐.
1997년 중국전의 일등공신 하면 전희철보다도 정재근을 먼저 말해야 되지만, 정재근이 코트에서 상대 선수를 대놓고 노린 팔꿈치 공격으로 병원으로 보내버린 사건 이후 내 속에 정재근에 대한 정은 단 한톨도 남지 않았음... 이라고 적지만, 상무 시절 서장훈 앞에 놓고 한 인 유어 페이스 덩크와 1997년 중국전에서 보여준 대활약은... 아이고.
그래도 내가 실시간으로 본 농구 코트 3대 폭력남 하면 정재근 김택훈 박상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