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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억의 배구스타 "강두태"

최강동원 2013. 12. 24. 20:42

이리 저리 배구관련 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강두태 선수에 대한 글이 올라온게 있었다.

지금은 잊혀진 아련한 스타 "강두태" 80년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스타플레이어였으나, 만년 2인자라는 설움속에 사진 한장 변변히 남기지 못한채 은퇴 후 1990년 급성 심장마비로 사명한 그분에 대한 글을 올려본다.

 

 

  추억의 배구팬들이라면 한 번쯤 떠올릴 왕년의 배구 스타지만… 지난 1990년, 급성 심장마비로 고인이 된 사실을 기억하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은 거 같습니다… 국내 배구 선수들 중, 장윤창이 왼손잡이 오른쪽 공격수로서 백어택을 최초로 시도한 선수라면, 오른손 잡이 왼쪽 공격수로서 백어택을 최초로 시도한 선수는 바로 강두태 선수입니다.

1958년생으로, 부산의 배구명문 성지공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2학년때 배구부의 해체로 인해 1978년 당시 국내 최고의 실업팀인 금성통신(현 구미 LIG 그레이터스)에 입단, 1989년까지 현역으로 활동하고 1985년부터는 금성 배구단 코치 겸 선수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대학생 때인 1976년부터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1986년까지 약 10여년간 많은 국제 대회에 출전하여 70,80년대 한국 남자배구의 중흥기를 이끌었고, 김호철, 강만수 등과 함께 소속팀 금성의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반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었습니다. 1983년 백구의 대제전 출범에 앞서 김호철, 강만수 등 금성 소속 선배들이 해외 진출을 활용하여 금성을 떠나 파격적인 조건으로 신생팀인 현대자동차써비스로 이적할 때 꿋꿋이 금성과의 의리를 지킨 금성의 몇 안되는 프랜차이즈 스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로선 매우 큰 키였던 197cm의 신장을 이용하여 내리꽂는 강타와 당대 비슷한 라이벌이었던 강만수의 카리스마 넘치는 플레이와는 달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사람 좋은 미소와 호리호리한 몸매의 제스처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왕년의 국가대표 : 1번 유중탁, 2번 차주현, 3번 장윤창, 5번 문용관, 9번 김호철, 7번 강두태, 11번 강만수, 12번 박기원


강두태 선수의 전성기는 1976년부터 1980년대 초반 국가대표팀과 소속팀 금성의 전성기와 같았습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김호철의 컴퓨터 토스 속에 강만수, 장윤창 등과 함께 좌, 우에서 고공 폭격으로, 소속팀 금성에서는 강만수-강두태 ‘양강’포로 절정의 기량을 뽐냈습니다.

하지만 오랜 배구팬의 한 사람으로써 저에게 강두태 선수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 현대차써비스와 고려증권 양강 체제 속에서 전통의 강자 자리를 빼앗기고 몰락한 금성을 외로이 지켰던 강두태 선수의 모습때문이었습니다.

 

뒤를 바라보고 있는 금성배구단의 선구가 강두태, 오른쪽 정면으로 보이는 고려증권 선수는 장윤창


83년 백구의 대제전 출범 이후, 금성은 과감한 투자를 하는 현대차써비스와 쓸 때는 쓸 줄 아는 효율적인 구단 운영을 하는 고려증권에 비해 소극적인 투자로 일관하며 전력 보강을 소홀히 하면서 팀 전력의 상당 부분을 강두태 선수 1명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금성의 스타일은 줄곧 이어져서 90년대 초반에는 이상열,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김성채, 최근에는 이경수로 이어지는 1인 원맨쇼 스타일의 팀 운영이 팀의 상징(?)처럼 굳어져버린 것 같습니다.

백구의 대제전 시절 금성 강두태의 플레이는 전성기 시절에 비해서는 확실히 떨어졌지만, 팀의 대들보이자 고참으로써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레프트 주공격수로서 팀 공격의 상당 부분을 혼자 맡아서 처리했고, 86년 이후에는 플레잉 코치 역할까지 맡으면서 ‘강두태 없는 금성’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팀 성적과 상관 없이 84년부터 87년까지 4년 연속 베스트 6에 뽑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봅니다.

당시 금성은 1986년 이후 강두태를 제외하고 엄한주, 이범주 등 고참들을 모두 은퇴시키고, 민완 세터 최봉호, 청소년 대표 출신인 레프트 이용선(188cm), 센터 홍기택(195cm), 라이트 김찬호(186cm) 등 젊은 선수들 위주로 세대 교체를 단행했지만, 강두태를 뛰어넘을 스타 플레이어는 없었습니다.

 

랠리 끝에 금성 공격의 해결사는 항상 강두태였고, 잔부상과 체력적 한계로 인해 벤치에서 쉬다가도 대체 선수의 부족으로 결정적인 순간엔 강두태가 꼭 필요했던 금성이었습니다. 당시 금성은 신인 선수 공급이 원활치 못해서 감독이었던 김충한씨까지 세터로 선수 등록을 할 정도로 고질적인 선수난을 겪었습니다. 특히 1987년 시즌 직후 있었던 신인 스카우트 경쟁에서 당시 최대어였던 한양대 레프트 이재필 선수를 가계약을 맺고도 고려증권에 빼앗기면서 강두태 선수는 은퇴를 늦추고 팀을 위해 현역 생활을 연장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988년 백구의 대제전 때 보여준 강두태 선수는 노쇠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2차례의 발목 수술로 인해 점프력은 눈에 띄게 저하되었고, 과거의 높은 타점에서 나오는 호쾌한 강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단지 오랜 관록에서 우러나오는 테크니컬한 공격으로 요령껏 버텼지만, 금성은 현대차써비스, 고려증권에게는 물론, 대한항공, 상무 등에게도 밀리면서 3차 대회 진출(당시 리그 운영 상 3차 대회는 1, 2차 대회 성적 합산 후 4강팀에게까지만 출전 기회가 부여되었음)에 실패, 대대적인 팀 개혁과 선수 스카우트에 나서면서 강두태 선수도 은퇴와 함께 금성 배구단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금성에 강두태라는 버팀목마저 없었으면 더욱 더 처참한 성적을 올렸을 것입니다. 이후 금성 배구단은 이상열(라이트, 195cm, 경기대 졸) 서남원(레프트, 186cm, 서울시립대 졸), 최영준(세터, 181cm, 한양대 졸), 이영국(센터, 189cm, 한양대 졸), 강호인(레프트, 190cm, 한양대 졸) 등 젊은 피들을 대거 스카우트하면서, 이상열의 금성 시대를 열고, 강두태의 금성 시대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강두태 선수 겸 코치가 배구판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1990년 어느날, 신문 부고란에 자그마한 토막 기사로, ‘전 국가대표 배구 선수 강두태 급성심장마비로 사망’이라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 아무도 그의 활약과 공로를 기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전 소속팀 LIG그레이터스도, 대한배구협회도 아무도 그를 기리는 사람이 없어서 배구팬의 한 사람으로써 매우 안타깝습니다.

70, 80년대 배구스타이자, 10년 연속 국가대표와 4년 연속 백구의 대제전 베스트 6, 소속팀 2차례 준우승 등 결코 가볍지 않은 공로를 세운 강두태 선수를 위해 거창한 상패나 기념패로 기리는 건 무리라고 치더라도, 적어도 그를 기억할 수는 있게끔 사진과 활약상을 담은 자료 정도는 남아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배구 명예의 전당이라도 생긴다면 최소한 강두태 선수의 사진이나 활약 모습을 볼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만일 살아있었더라면 지금쯤 한국 배구계를 위해 적지 않은 기여를 했을 강두태 선수를 생각해보면 매우 아쉽고, 그런 선수를 기억 조차 하지 못하게끔 사장시키는 배구계의 모습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김호철의 토스가 무한정 강만수에게만 쏠리고 있고 장윤창처럼, 이종경처럼, 그 흔한 공격모션조차 취하지 못하는 어쩡쩡한 자세를 하고 코트를 기웃거려도 나는 그가 좋았습니다.
아시아권을 넘어선 거포로 평가받는 강만수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도, 돌고래쑈를 펼친다며 기교만점인 장윤창의 플레이에 매료되는 분위기가 있더라도, 나는 마냥 강두태가 좋았습니다.
세번공격에 두번 가로막힐지라도 그나마 한번 제대로 꽂히면 마룻판에 구멍이 생겨버릴 것 같은 그의 무지막지한 강타가 좋았습니다.

오관영해설위원은 참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이미 산전수전 다겪은 이종경, 이채언이 있는 경기대학교와 그가 있는 금성이 맞붙을 때면, 으레 상투적인 코멘트를 했었죠.
"실업의 노련미와 대학의 패기가 맞붙는...어쩌구저쩌구....."
단언컨데, 강두태의 금성은 그가 숨을 거두는 날까지 패기만 있을 뿐 노련미는 없었습니다. 은퇴할 때까지 그의 페인트 공격에 상대편이 속아준 경우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무지막지한 강타' 그가 가진 것은 오직 그것 하나였습니다. 그 강타 하나에 나는 숨이 넘어갔었습니다.
가슴속의 체증이 내려가고, 쌓인 스트레스가 내려갔습니다. 나를 배구팬으로 유혹한 것은 그의 무지막지한 강타였습니다.


언젠가 시합도중에 그의 콘택트렌즈가 빠져버린 경우가 있었죠. 경기를 중단하고 모두들 그의 렌즈를 찾으러 두리번 거렸을 때, 나는 속으로 말했습니다.
"없어도 마찬가지야, 그냥 해......"
눈을 감고 때리든 눈을 뜨고 때리든 어차피 후려갈길 텐데, 굳이 그것을 찾아서 무엇하겠냐는 말이었다.
잡스러운 공격을 극도로 자제하던 선수, 게임의 결과에 상관없이 늘 선 굵은 플레이를 펼쳐보이던 선수, 때문에 그로 인해서 게임을 망치는 경우도 많았고, 현대와 고려증권의 영원한 조연으로 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금성...
나는 그 금성을 좋아했습니다. 그의 투박하고 촌스러운, 그렇지만 더없이 남자다운 그의 플레이가 좋았습니다.
끝내, 그는 그의 짧고 굵은 삶마저 좋아해달라는 듯, 그렇게 떠나더군요.


내가 배구팬이던 시절은, 김세진이 신인왕을 먹었던 해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세진은 아직도 나에겐 신인으로 남아있습니다.
마치 강두태의 분신처럼 나타났다가 그의 죽음처럼 짧고 허망하게 떠나버린 이상렬선수를 보내면서, 나의 배구는 조용히 사그러들었습니다.
가끔, 요즘 배구팬들이 측은하게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기껏, 신진식 아니면 이경수 선수의 강타밖에 볼 수 없는 것 때문에 말입니다.
시합전 경기장에 일찍 찾아가면 코트로 내려가, 스파이크 연습하는 선수들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답니다.
강두태선수, 이상렬선수의 공이 떨어진 마룻판의 진동이 발바닥으로 전달될 때의 그 희열을 느낄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말입니다.


 

출처 : 달파란세상
글쓴이 : 달파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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