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스크랩] 이창수, 모범생과 악당 사이의 `투페이스`

최강동원 2014. 1. 13. 00:58

 

 

최고령 농구선수 이창수 이야기(1)-모범생과 악당 사이.

 

배트맨을 보면 투 페이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마징가제트에는 아수라 백작이라는 악당 캐릭터가 있다. 똑같이 하나의 얼굴을  서로 상반된 두 개의 표정이 공존하는 얼굴이다. 사람마다 누구나 선과 악의 양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만일 당신이 이창수라는 농구선수를 알고 있다면? 그에 대한 이미지는 아마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묵묵한 조연으로 궃은 일을 수행하며 40대의 나이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갔던 '모범생' 큰형님이거나, 혹은 동업자의식을 망각한 지저분하고 폭력적인 플레이로 한 선수의 농구인생을 완전히 망쳐놓을뻔 했으면서 정작 지신은 '가늘고 길게' 누구보다 장수했던 얄미운 '악당' 중년이거나..

 

 

 

"농구 징허게 오래도 했당게...."

프로화 1세대 출신으로 또래들이 다 은퇴하여 프로나 대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창수는 조카뻘 되는 후배들과 함께 현역으로 코트를 누볐다.

 

이창수가 코트를 떠난다. 농구대잔치 시대부터 활약했던 프로화 1세대 멤버이자 현역 4대프로스포츠 최고령을 통틀어 최고령 선수, 이창수가 드디어 27년에 걸친 영욕의 농구인생을 마감한다.

 

 

사실 이창수의 은퇴를 바라보는 기분은 다소 묘하다. 최근 몇 년간 농구대잔치 세대 스타들의 은퇴를 숱하게 접했지만, 이창수가 이들보다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한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이창수가 이상민이나 서장훈처럼 프로농구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만큼 비중있는 스타도 아니고, 기억날만큼 인상적인 하이라이트 필름 한 장면도 없다. 경희대 재학시절인 농구대잔치에서 한 경기 최다리바운드 기록도 세울만큼 나름 촉망받는 선수였지만, 실업과 프로출범 이후에는 선수생활 내내 쭉 벤치멤버로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이어왔을만큼 존재감은 미미했다.

 

 

단지 이창수를 언급할때면 프로 출범 이후 외국인 선수들이 득세하는 골밑에서 드물게 토종빅맨으로 오랫동안 장수했다는 점이나, 간염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투혼 정도가 인상에 남아있을 뿐이다.

 

 

이창수의 은퇴를 바라보는 많은 팬들의 반응이라면, 이상민이나 문경은같은 선수들때처럼 '아, 또 한명의 스타가 떠나는구나'하는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이런 선수도 있었네, 와, 근데 이 사람 참 오래도 살아남았구나'하는 감탄사에 가깝지 않을까싶다. 하긴 내노라하는 별들도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못하고 사라지는 와중에, 화려한 스타도 아니었던 선수가 꾸준히 존재가치를 인정받아 치열한 경쟁의 세계속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만큼 대단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창수를 기억하는 팬들의 이미지가 '노익장'이나 간염투혼같은 긍정적인 미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올드팬들에게는 이창수라는 이름을 들을때면 서장훈이라는 인물이 자연스럽게 연관검색어로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않다. 아직도 임달식하면 허재라는 이름을 연상하는 것처럼, 벌써 16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지만 당시의 사건들은 이창수라는 선수의 농구인생에서 지울수없는 주홍글씨로 남아있다.

 

 

"우쒸~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아직도 이러기야?"

"미안허다. 그치만 내갠 부양할 가족이 있당게...."

 

 

사건 x파일: 서장훈 린치 사건의 진상은?

 

 

사건은 1995년 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94~95 농구대잔치 8강전에서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와 삼성전자가 맞붙었다. 당시 이창수는 경희대를 졸업하고 상무를 거쳐 삼성전자에서 주전센터로 활약하고 있었다. 삼성전자는 그해 정규시즌에서 고전을 면치못하다가 8위로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했는데 8강에서 1위팀 연세대학교를 만나게 되었다.

 

 

서장훈의 연세대는 전년도 디펜딩챔피언이자 정규시즌 2년연속 전승우승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던 최강팀이었다. 당시 국내 무대에서 서장훈의 위력이라는 것은,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샤킬 오닐+ 덕 노비츠키'의 전성기를 합친 수준이어서 아예 정상적으로 막는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서장훈을 상대하기위한 삼성전자의 센터진은 이창수와 박상관, 강을준 등으로 구성되었다. 박상관이 2미터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수준이고, 이창수가 196cm, 강을준이 190cm에 불과했으니 일단 높이와 힘에서부터 상대가 안됐다. 그런 서장훈을 막기위한 삼성전자 김인건 감독이 제시한 유일한 방법은 바로 '핵 어 용가리'였다.

 

 

샤킬 오닐도 전성기에 거친 수비를 많이 당했다지만 당시 삼성전자의 수비라는 것은 농구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구타,폭력이었다. 서장훈이 공을 잡으면 에워싸고 팔을 치거나 뒤에서 붙잡고 늘어지는가하면 심판의 눈이 보이지않는 사각지대에서 고의적으로 가격을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박상관, 이창수같은 센터들만이 아니라 도움수비를 들어오는 가드나 포워드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많이 줄어든 편이지만 80~90년대만 해도 구시대적인 폭력농구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다. 허재나 서장훈같이 정상적인 수비로 도저히 막을수없는 걸출한 스타들의 경우, 파울을 빙자하는 구타와 폭력으로 평정심을 잃도록 도발하는,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비열한 수법이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당시 일방적인 린치를 당한 것은 서장훈만이 아니었다. 당시 연세대와 삼성전자의 경기는 과열조짐을 보이면서 말그대로 살벌한 격투기를 방불케했는데, 우지원은 8강 2차전 도중 김승기(현 KT코치)에게 일분사이에 두 번이나 안면을 가격당하여 쓰러지기도 했고, 백업센터 구본근도 이창수의 팔꿈치에 턱을 얻어맞아 나동그라지기도 했다.

 

 

심지어 서장훈은 바로 전년도까지 한솥밥을 먹었던 대학선배인 문경은한테도 팔꿈치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기도했다. 이때는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서장훈도 위아래 계급장떼고 욕설을 내뱉으며 문경은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고 김현준조차 평소 신사적인 이미지와 달리 까마득한 후배 이상민을 불알치기로 쓰러뜨릴때는(이것은 같은해 정규시즌 경기때였다.) 이게 도대체 농구인지 동네 개싸움인지 아연할 지경이었다.

 

 

시한폭탄같은 분위기는 결국 1승1패로 맞선 3차전에서 사단이 나고야말았다. 연세대가 근소한 리드를 잡으며 팽팽하게 맞서던 전반 종료직전, 자유투 상황에서 리바운드를 따내고 박스아웃을 시도하던 서장훈은 뒤에서 날아온 팔꿈치에 목을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졌다. 서장훈의 운명이 바뀌던 순간이었다.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 많은 이들은 당시 팔꿈치 어택이 이창수의 작품인줄 기억하는 이들도 많은데, 그 주인공은 바로 박상관이었다. 물론 이창수도 당시 어린 선수들을 상대로 많은 거친 파울을 저질렀다. 하지만 박상관의 플레이는 그저 거친 수준을 떠나 명백한 살인미수에 가까웠다. 설마 일부러 서장훈의 목을 노리고 가격한 것은 아니겠지만, 과열된 분위기속에 신체접촉이 많은 골밑에서 상대 선수에 대한 동업자의식 따위는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않고 위험천한만 행동은 자행한 것은 명백했다. 무엇보다 서장훈이 코트에서 실려나갔음에도 전혀 죄책감같은 것은 느껴지지않은 뻔뻔한 표정은 섬뜩할 정도였으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를 할수도 있고, 때로는 잘못된 짓을 할때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긴이라면', 넘지말아야할 선이 있다.

 

본인이 얼마나 속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수없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렀어도 그 기억은 쉽게 잊혀지는게 아니다. 가해자는 몰라도 피해자에겐...

 

참고로 서장훈과 박상관의 악연은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시에 이창수는 아직 상무에 있을때였는데, 삼성전자가 세대교체기를 맞으며 이렇다할 장신선수가 없었던 탓에 그때까지만 해도 박상관이 홀로 서장훈을 막아야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도 이미 일대일로는 수비가 불가능했던 스무살 서장훈을 상대로 박상관은 어쩔수없이 육탄방어를 하다가 파울트러블에 걸리는 경우가 잦았다.

 

 

당시 혈기왕성하던 스무살의 서장훈은 한창 떠오르는 스타로 주목받던 시기여서 종종 자신감이 넘쳐 건방지다는 인상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때부터가 서장훈 안티 역사의 출발점이다.) 93~94농구대잔치 4강전때는 경기도중 박상관에게 바스켓카운트를 얻어낸뒤 서장훈이 박상관의 등뒤에서 '넌 나한테 안돼'하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흔들며 썩소를 날리는 포즈(이 장면은 TV 중계화면에도 잡혔다)를 취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박상관의 거친 파울성 수비에 대한 나름의 복수였지만, 국내 정서를 감안할 때 한참 후배격인 어린 선수가 취하기에는 굉징히 부적절한 행동이었던것도 사실이다.

 

 

그때부터 박상관과 서장훈 사이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박상관이 거친 플레이로 서장훈을 바닥에 쓰러뜨리면 서장훈이 대놓고 박상관을 노려보며 사과도 거부하는 식의 감정대립이 여러 번 지속됐다. 하지만 서장훈의 태도가 어찌되었든 간에 악의적인 린치를 가한쪽은 박상관이었고 서장훈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었다.

 

 

다시 부상 장면으로 돌아오면, 서장훈은 목부상을 당한 뒤 그대로 코트에서 실려나갔고, 경기는 삼성전자의 흐름으로 바뀌었다. 아직까지 의식은 남아있던 서장훈은 곧바로 병원후송을 거부하고 후반전 잠시 코트로 돌아와서 다시 경기출전을 강행했지만 이미 목신경이 손상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플레이가 불가능했고 다시 교체된 이후 경기가 끝날때까지 들어오지못했다. 연세대는 후반 슛감각이 살아난 우지원의 연속 3점슛으로 막판까지 접전을 벌였으나 서장훈에 이어 석주일과 구본근까지 연이어 5반칙 퇴장을 당하며 높이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삼성전자에 77-83으로 역전패를 당했다.

 

 

당시 벤치에 앉아서 목에 얼음찜질을 하면서 경기가 끝날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장훈의 허무하고 멍한 표정과 반대되게, 비열한 승리를 거두고도 환호하던 박상관과 이창수, 문경은 등 삼성전사 선수들의 표정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사건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서장훈의 목부상에 이어 또다른 센터 구본근도 경기후 갑작스러운 심장발작 증세를 보이며 병원으로 후송되었다.이 경기는 그때도 뉴스와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만큼 후폭풍이 컸다. 하지만 정작 농구협회는 삼성에 대하여 어떤 징계도 내리지않았다. 삼성전자는 그해 준결승에서 SBS를 꺾고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허재가 신들린 활약을 보인 기아자동차의 벽에 무릎을 끓었다. (당시 기아자동차와 삼성전자의 4차전은 허재의 역대 하이라이트 필름중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경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달리 기회가 되면.. )

 

 

"지두 식스맨상 하나 챙겼어라..."

창수옹의 프로농구인생에서 유일한 수상경력이다.

 

지금처럼 미디어가 고도로 발달되어있는 시대라면 어떠했을까. 그때도 공중파에서 생중계된 경기였고 지금보다 농구인기가 절정을 구가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않았기에 망정이지, 지금같았으면 더 큰 난리가 나고 사회적인 문제가 됐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박상관과 이창수는 한동안 삼성의 '조폭 센터 듀오'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당시 폭력농구에 가담한 것이 이 둘만은 아니었지만, 서장훈의 부상도 그렇고 몸싸움이 치열한 골밑에서 유독 지저분한 하드 파울을 자주 구사했던 두 선수에 대한 이미지가 가장 안좋게 굳어질수밖에 없었다. 쉴드를 치려는건 아니지만, 솔직히 따지면 이 둘한테만 죄가 있겠는가. 처음부터 그런 플레이를 지시하거나 묵인한 감독놈이 더 문제지.

 

 

이건 좀더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김인건은 뒤에 프로농구 초창기때 진로구단의 단장으로 선임되어 뻔뻔하게도 서장훈의 영입을 추진하려다가 딱지를 맞기도 했다.

 

 

한편 박상관은 프로화 이후에도 꾸준히 선수생활을 이어가며 악명을 떨쳤는데 99~00시즌에는 당시 서장훈의 SK 나이츠와 삼성의 4강플레이오프에 맞딱뜨렸다. 이번의 피해자는 서장훈이 아니라 조상현이었다. 경기도중 레이업을 시도하는 조상현의 얼굴을 팔꿈치로 후려쳐서 이마가 찢혀 선혈이 낭자하게 만드는 사고를 치기도 했다.박상관은 곧바로 SK 벤치를 찾아가 사과를 했지만 당시 온순한 최인선 감독이 대놓고 육두문자를 날릴만큼 파울의 질이 좋지않았다. 할줄아는게 몸빵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박상관은 현재 명지대 코치를 거쳐 2008년부터 감독직을 맡고있다. 그따위로 선수생활을 해놓고 대학에서 애들한테 뭘 가르칠게 있을지 의아하지만, 꽤 오랜 시간 감독직을 해먹고있으며 꾸준히 프로지명선수들을 배출하는 걸 보면 그래도 생긴거랑 다르게 운은 좋은 모양이다.

 

 

박상관에 비하면 이창수는 그래도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다. 이창수가 당시 연세대와의 경기에서 폭력으로 얼룩진 악명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알고보면 그 이전이나 이후로 '더티 플레이어'라는 딱지를 붙일만큼 플레이가 지저분하거나 물의를 일으킨 경우는 정작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2편에서 계속..)

 

 

여러분의 소중한 공감지수와 의견을 남겨주세요. ↓↓

출처 : 일생에 단 한번, 아주 특별한 순간
글쓴이 : 구사일생 원글보기
메모 :

'농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95-96 농구대잔치 기아Vs. 고려대...  (0) 2014.03.09
모비스 Vs. LG...  (0) 2014.01.22
[스크랩] 추억의 배구스타 "강두태"  (0) 2013.12.24
한국농구 레전드...  (0) 2013.12.17
전희철...  (0) 2013.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