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 교정시설...(사건사고포함)

[스크랩] 침몰 당시 유리창에 보이는 생존자들 .. 이게 구존가?

최강동원 2014. 10. 8. 22:36

 

숨진 학생들이 한꺼번에 발견되면서 초기 구조 실패에 대한 아쉬움이 짙게 배어나오고 있다.
특히 수습된 상당수 시신에서 손가락이 골절된 것으로 드러나

선실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친 흔적으로 보인다.

민관군합동구조팀은 지난 21일과 22일 이틀 동안 3층 식당과 4층 선실 등에 대한

구조.수색에 나서 주검 70구를 수습했다.
특히 23일 오전에만 4층 선미 부분에서 많은 시신이 수습되는 등 사망자가 150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날 오전 발견된 시신 22구는 주로 학생들이었으며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수색 작업에 참여했던 한 민간 잠수부는 “수습된 시신들의 손가락 상태가 엉망이었고

손가락이 골절된 시신이 많았다”고 말했다.
문틈으로라도 손가락을 넣어 문을 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다 생긴 골절이라는 설명이다.

골절을 전문으로 하는 한의사는 “시신들의 손가락이 골절됐다면

선실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다

부러진 것 같다”면서 “얼마나 공포감 속에 고통을 겪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누군가 선실의 유리창만 깨뜨렸다면 밧줄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그들을 배 밖으로 나오게 했을 것이다.

구명조끼를 입고 선실에 있던 학생들을 배 밖으로 꺼내기만 하면

주변에 있던 어선들에 의해 바로 구조됐을 것이다.

당시 사고 해역의 해수 온도는 15도 정도였다.
전문가들은 이 정도의 수온이라면 조난자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상태에서 두시간 이상 저체온증을 버틸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해경과 해군의 최초 구조작업이 배 밖으로 나와 있는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과

어른들 구조에 집중하기 보다는 선실에 대기하고 있던 학생들 위주로 이뤄졌다면

손가락이 부러진 시신은 크게 줄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구조됐을 것이다.

그러나 해경의 초동 구조는 선체에 진입해 구조작업을 벌이거나

물에 잠기지 않은 선실의 유리창을 깨는 등의 적극적인 구조활동은 이뤄지지 않았고

단지 배 밖으로 나와 있는, 보이는 승객들을 구조하는데 그쳤다.

초동 출동 당시 승객들에 대한 상황파악이 안됐거나

현장 구조전문가가 초동 구조대에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해경은 세월호의 신고도 늦었고 출동도 더뎠기 때문에

갑판이나 선실 밖으로 나온 승객들 구조하기에도 바빴다고 해명할지 모른다.

해경 헬기는 구조용 바구니를 이용해 한 명씩 헬기로 들어 올리는 방식이어서

짧은 시간에 대량 구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현장에 파견된 해경 구조대원들이 승객들을 구조용 바구니에 태우는 일을 돕는데 치중했으니

선실 접근이나 선실의 유리창을 깨고 구조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을지 모른다.

해경 구조대가 헬기 구조와 배 승선을 돕는데 심혈을 기울이지 않고

물에 완전히 잠기지 않은 선실의 3층과 4층, 5층의 유리창을 깨고 선내에 진입했다면 구

조 인원은 174명보다 훨씬 늘었을 것이다.

해경 구조대가 세월호에 도착해 첫 구조작업을 할 때부터 세월호가 90% 이상 물 속에 잠긴

10시 30분쯤까지 60분의 시간, 구조의 황금시간대였다.

실제로 해경 산하의 진도해상교통관제센터(VTS)는 세월호와 교신하면서

학생을 포함해 450-500명가량이 승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다.

해경도 많은 학생들이 타고 있었음을 알았을 텐데

정작 그들을 위한 공격적인 구조에는 미치지 못했다.

실제로 구조에 참여한 한 민간인은

“배가 엄청 큰데도 구조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한 바 있다.

배가 침몰하는 상황이었던 만큼 경황이 없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해경 구조대의 일부만이라도 손도끼로 학생들이 대거 머물던 4층 선실의 유리창을 마구 깨뜨렸다면 어땠을까?

너무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강원도 동해시에서 문어를 잡는다는 한 잠수부는 “텔레비젼을 보니

선실의 유리창이 보이던데 왜 유리창을 깨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구조대라면 당연히 선실의 유리창을 부셔서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왜 안 했는지 모르겠다”고 한탄을 하기도 했다.

 

 

배 안에 친구들이" 삶과 맞바꾼 우정..단원고 양온유양 살신성인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던 지난 16일 오전 10시쯤 양봉진(48)씨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지인의 전화가 걸려 왔다. 경기도 안산 명성교회 관리집사여서 평소처럼 교회 서류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인이 시키는 대로 TV를 켜보니 배가 가라앉고 있었다. 단원고 2학년인 딸 온유(17)가 탄 배였다.

온유는 오전 7시쯤 엄마에게 '배에서 자고 일어났다'는 문자를 보내온 터다. 양씨는 곧바로 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이후 1시간 동안 몇 번인지 셀 수 없을 만큼 전화기 버튼을 눌러댔고 끝내 연결되지 않아 10시56분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온유야, 아빠다. 너를 위해 모두 기도하고 있다. 이럴 때 침착해야 하는 거야. 친구들에게도 동요하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면 구조될 거라고 용기를 주렴….'

이 문자에도 답이 없던 온유가 그때 뭘 하고 있었는지 양씨는 닷새 뒤에야 알게 됐다. 딸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지난 20일 비통해하던 그에게 구조된 딸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온유는 갑판까지 나왔다가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갔어요. 방에 남아 있는 친구들 구한다고."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424020104670

 

 

못난 어른들을 용서해줘..미안하다..

 

 

 

우측 객실 썼던 우린 딱 3명만..9반·10반의 '눈물'

 

22일 오후 진도실내체육관에서는 한 남성이 단상에 올라 "9반, 10반 학부모님들 3번 게이트 쪽으로 모여주세요. 시신 확인하러 팽목항으로 출발합니다"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 몇몇 학부모들이 자리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미처 방송을 듣지 못한 한 학부모는 "무슨 일이냐. 어디에서 연락이 온 것이냐"며 급박하게 주변에 묻기도 했다. 다른 학부모는 "○○ 발견됐대요? 여자반 애들 발견된 거예요?"라며 안타까워했다.

단원고 관계자는 "오늘(22일) 9반 학생들의 시신이 처음으로 많이 발견됐고, 10반 학생들의 시신도 인양됐다"며 "아직 DNA 확인 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 정확한 숫자를 밝히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325명이 떠난 수학여행길에 현재까지 구조된 학생은 75명뿐이다. 우측 객실을 배정받은 9반과 10반 학생들은 다른 반에 비해 구조 인원이 훨씬 적었다. 각각 23명인 반 인원 중 9반은 2명, 10반은 1명만이 사지를 탈출했다.

세월호가 좌측으로 기울면서 좌측 객실을 배정받은 학생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먼저 파악했고, 바다로 뛰어들기도 쉬웠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반면 우측 객실 안에서 대기하던 9, 10반 여학생들은 이미 60도 이상 기울어진 경사를 올라 출입문 밖으로 탈출하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던 9반 담임 최모(24·여)씨 역시 사망했다. 최씨는 당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걱정하지 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는 글을 올리고 10여명을 구출하다 자신은 탈출하지 못했다.

졸지에 친구들을 모두 잃게 된 9반과 10반 생존 학생들에 대한 주변의 안타까움도 커지고 있다.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불안감도 보이고 있다. 단원고 생존자 학부모들은 대국민 호소문에서 "살아남은 아이들마저 죄인이 된 심정"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14년 전 부일외고 수학여행 사고로 같은 경험을 했던 김은진(30·여)씨는 지난 19일 서울대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 "살아 있는 사람도 돌봐 달라"고 호소했다. 김씨는 "평생 '왜 나를 살려주지 않고, 왜 나를 데리고 나가지 않았냐'는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면서 "생존자들과 남은 가족들이 절대 자신을 탓하게 하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부일외고 수학여행 참사는 2000년 7월 1학년 학생들을 태운 관광버스 4대가 경북 김천시 경부고속도로에서 승용차 등 차량 5대와 연쇄 추돌하면서 18명이 숨지고 97명이 다친 사고다. 김씨는 당시 버스 안에서 정신을 잃었으나 친구들이 업고 나와 화를 면했다.

 

 

 

입에 신분증을 문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거 우리 딸 맞아! 진짜야, 어떡해∼.”

23일 오전 11시40분쯤 전남 진도군 팽목항 부근 임시 막사 안에서 외마디 절규가 터졌다. 막사 안에 덩그러니 서 있는 인양 시신 정보 게시판을 불안한 눈빛으로 훑던 한 어머니의 절규였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다 주저 앉아 버린 그의 손에는 ‘146번째 신원 미상자 특징’이라고 적힌 종이가 쥐여 있었다. 근처에 있던 의료진 3명이 바로 부축해 인근 의료진 막사로 옮겼다. 이를 바라보던 다른 50여명 실종자 가족들은 가슴을 졸이며 게시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고대책본부는 시신이 인양될 때마다 시신별 특징을 메모해 게시판에 붙여두고 실종자 가족들이 찾아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게시판에는 이날 오전에 인양된 시신 21구를 비롯해 앞서 인양된 시신 중 신원 확인이 안 된 30여구의 특징을 적어 놓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특히 실종자 가족들이 당국에 요청한 ‘시신 수습과 생존자 확인’ 데드라인(24일)이 하루밖에 남지 않은 터여서 막사 안팎은 절박감이 가득찼다.

게시판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한 부부는 시신의 의복 특징 등 ‘138번째 신원 미상자’ 안내문을 본 순간 “우리 제훈이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수학여행을 떠나던 아들이 입은 옷가지가 어땠는지를 떠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결국 맞다는 확신이 들자 부부는 체념한 듯 울음을 삼키며 막사를 빠져나갔다. 옆에서 신원 미상의 시신이 아들인 줄 알고 엉엉 울던 또 다른 어머니는 “아이고, (다시 보니)아니네 우리 아들…”이라며 눈물을 훔치고 돌아섰다.

☆★

이처럼 자식을 찾지 못할 부모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듯 학생으로 추정되는 실종자 중 신분증을 입에 문 시신이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진도실내체육관도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다. 오전에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가족이 오열하거나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여전히 자녀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부모들은 “우리 애는 언제 나오는 거예요…”라며 탄식을 쏟아냈다. 생환의 가능성이 점점 희미해지면서 인사도 못한 채 먼저 눈을 감은 피붙이의 몸이라도 온전히 거두고 싶다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재난의료지원단과 진도보건소 이동진료소 소속 의사와 간호사들은 숙연한 표정으로 진이 빠진 가족들의 건강을 챙겼다.

한편 팽목항에는 연이은 구조작업으로 잠수병을 호소하는 잠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민·관·군 합동구조팀에 따르면 잠수사 10명이 마비증세와 피로누적으로 청해진함과 평택함 내 감압체임버에서 치료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신 부패를 우려한 구조대가 매뉴얼을 지키지 않고 수색활동 횟수를 늘린 게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에 따라 천안함 사건 당시 수중수색 중 순직한 한주호 준위와 같은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팽목항의 민간잠수사는 현재 20∼30여명 남아 있으며 100여명은 전날 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04/23/20140423004539.html?OutUrl=daum

어린학생들이 차디찬 바다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도 너무나 마음이 아픈데,

신분증을 손에 쥐거나 입에 물때..

자신이 끝이라는 것을 알았을땐 기분이 어땠을까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출처 : 미제사건추적-그들은살고싶었다
글쓴이 : 아름다운현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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