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명승부 (2) 93~94 농구대잔치
2003.1.19 일요일
추억의농구디비기우원회
한국농구의 매력은 무엇인가?
93~94 농구대잔치는 앞서 말한 슬램덩크와 마지막 승부, 조대인 쇼타임이라는 든든한 빽의 지원 아래 한국농구가 르네상스를 구가했던 시기였다. 무엇이 그토록 한국농구를 사랑받게 만들었는가?
흔히 이 시기의 한국 농구를 폄하하는 사람 중에는 '10대 여고팬들에 의존한 빠순이 농구'니 '주구장창 3점 쏴댈 줄 밖에 모르는 슈팅 중독'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당시 한국농구가 대중적으로 사랑받고, 기량 면에서도 아시아 정상급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한국 3점 많이 쏴댄다. 선수 대다수가 고른 슈팅 레인지와 정확도를 보유하고 있는 리그도 드물 뿐더러, 돋보이는 것은 한국농구가 오픈 찬스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다. 외국의 리그와 비교해 본다고 할지라도 웬만큼 3점이 좋다고 하면 흔히 슈팅력만을 놓고 이야기 하는 게 대다수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공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외곽찬스를 만들어내기 위한 움직임이 대단히 좋다. 스피드는 얼마나 빠른가? 프로출범 이후 외국인 선수들도 인정하듯이, 한국농구만큼 Run & Gun이 보편화되어 있는 다이내믹한 리그는 찾아보기 힘들다. 생각없이 쏴대는 3점이 아니라, 단신의 핸디캡에서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농구로 팬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당시 대학농구의 인기를 주도했던 스타들 중에는 물론 실력보다 과대평가된 선수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분명 당대 최고의 선수였을 뿐 아니라, 농구 인기를 불러일으킨 주역들이었다.
전희철, 현주엽, 이상민 같은 선수들의 대학 때 플레이는 결코 지금 신인 선수들의 기량에 뒤지지 않는다. 이들의 인기가 비록 10대 팬에 치우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탤런트도, 가수도 아니고, 농구선수일 뿐이다. 그들이 한국농구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과 전성기 때 플레이를 무시하고, 눈앞의 현재로서만 평가하려드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이다.
93~94 농구대잔치
이 대회에는 총 12개 팀- 실업부(기아, 삼성, 현대, SBS), 금융부(기은,산은, 한은, 상무), 대학부(연세, 고려, 중앙, 명지)- 이 출전했다.
경기방식은 대학연맹전 성적순 상위 4강으로 각각 나뉘어 조별리그를 치르고, 이 팀들이 풀리그로 격돌하는 2차 대회를 치른다. 이렇게 총 14경기(동률일 경우, 승자승 원칙)의 성적에 따라서 1위부터 8위까지의 시드 배정을 받아서 3차 대회(플레이오프)가 시작된다. 지금 프로농구에 비하면 참 단순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것도 장기레이스였다.
93~94 대잔치는 대학 vs 실업의 본격적인 대결구도가 시작된 대회였다. 대학팀들은 일단 신장과 파워에서 실업 선배들보다 두드러지게 앞서 있었다. 용가리(2m7)을 앞세운 연세대를 비롯하여 고려대, 중앙대 등이 모두 양질의 센터뿐만 아니라 190대 이상의 장신 슈터들을 보유하여, 실업 선배들보다 높이에서 확고한 우위였다. 더구나 스피드와 파워를 앞세운 화끈한 공격농구는 실업팀을 능가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 시기의 한국농구는 한마디로 시원시원했다. 한국 농구의 전매특허인 속공과 3점슛은 모든 팀이 고루 갖춘 주요 옵션이었고, 간혹 터지는 덩크슛 -문경은이 절대 노마크에서만 보여준 백덩크, 용가리를 제치고 꽃아넣은 정재근의 원핸드 덩크- 이 경기의 양념 구실을 했다.
참신한 새 얼굴에 목말라있던 농구계는 새로운 스타들의 등장에 환호하였으며, 종전까지 한 수 위로 여겨졌던 실업팀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이제는 대학팀들의 승수쌓기 제물이 되어 있었다. 농구장은 오빠들을 보러온 소녀팬들로 가득찼고, 이상민, 우지원, 전희철 등 꽃미남 스타들은 가는 곳마다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정규리그
연세대의 독주, 그리고 용가리
연세대는 이 당시에 이미 국가대표를 3명이나 보유해서 네임밸류에서는 단연 대학최강팀이었지만, 당해 대학리그에서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우수한 선수들은 많았으나, 스타의식에 젖어있던 선수들은 저마다의 임무를 망각하고 이기적인 플레이를 펼쳤고, 최희암의 분업농구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그 결과는 대학연맹전에서의 부진으로 나타났다.
역시 큰 경기를 앞두고는 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법. 연세대는 감독 이하 선수 전원이 정신재무장의 표현으로 삭발을 단행함으로써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대개는 훈련소 스타일로 가볍게 다듬어준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상민, 석주일 등 몇몇 선수들은 중고딩을 연상시키는 반항적 빡빡머리로, 그들에 열광하는 오빠부대 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당시 이충희-김현준의 계보를 잇는 한국의 차세대 대표슈터로 주목받던 3점포의 대명사 문경은, 매끈하고 뺀질뺀질한 외모로 코트의 황태자(얼굴만)란 닉네임을 가진 우지원, 1학년 때 대잔치 어시스트왕을 차지할 정도로 리그 최고의 게임메이커 이상민 등 연세대는 멤버 구성면에서 최강의 호화멤버였다.
특히, 이미 고교시절부터 초고교급 선수로 인정받았던 용가리의 등장은 팬들에게는 충격, 상대팀에게는 재앙이었다. 한국농구에 이제껏 단 한차례도 가져보지 못한 거구의 센터. 단순히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사이즈와 파워(덤으로 인상까지)에서 전례 없던 위압감을 선사하던 불뿜는 용가리의 등장 허재, 강동희, 김현준 등으로 대표되는 테크니션 위주의 한국농구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용가리의 위력은 당시 김유택-한기범으로 대표되던 고공농구의 판도를 일거에 바꾸어놓았다. 당대 최고센터이자 리바운드왕으로 인정받았던 김유택은 용가리에게 밀려 리바운드 2위로 내려않았고, 용가리는 신입생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리바운드 1위, 득점 5위의 맹활약을 펼치며 데뷔 첫해 리그 최고의 센터로 화려하게 등장했다.
장신선수는 슈팅력이 떨어지고, 느리다는 고정관념과 달리 그의 플레이는 센터로서는 대단히 빨랐고, 파워풀했으며, 정교한 야투를 지니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장신에 의존한 골밑 플레이가 많았고, 무엇보다 자유투가 형편없었지만..)
정규리그에서의 연세대는 대학리그에서의 부진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한 마디로 펄펄 날았다. 1차 대회에서 라이벌 고려대와의 경기에서 83-73으로 이기며, 자신감을 회복한 연세대는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기아자동차와의 경기에서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94-9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라 강력한 우승후보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연세대는 여세를 몰아 정규리그 14전 전승으로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과 최초의 전승 우승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큐에 때려잡으며,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하였다.
플레이오프
1위 연세대 vs 8위 기업은행
2위 기아자동차 vs 7위 중앙대
3위 상무 vs 6위 현대전자
4위 고려대 vs 5위 삼성전자
(8강과 4강전은 3전 2선승제, 챔피언 결정전은 5전 3선승제)
대회 최대의 이변, 8강 중앙대 vs 기아자동차
93~94 대잔치에서 가장 화제를 모았던 팀은 연세대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먹었던 경기는 이 대회 8강전, 기아 vs 중앙대 전이다.
멤버 대다수가 중대 출신으로 구성되어서 동문회 농구시합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던 이 시리즈는 감히 자신하건대 농구대잔치 역사상 최대 이변을 가져온 업셋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몇년간 연,고대에 스카우트 전쟁에서 밀렸던 중앙대는 이번 대회에서 다소 기복심한 플레이를 보이며, 7위로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한데 비하여 기아자동차는 비록 정규리그 우승은 놓쳤지만, 연세대에게 당한 1패가 전부일 정도로 여전히 막강 전력을 구축하고 있는 우승 후보였기에, 8강전은 통과의례 정도로 치부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중앙대의 베스트5는 조동기, 김영만, 양경민, 홍사붕, 김승기..
김영만(현 LG)과 양경민(현 TG)은 본래 센터 출신이었으나, 중앙대에서 슈터로 전환하여 정상급 플레이어로 성장했고, 김승기(현 TG)는 이 당시에 이상민과 쌍벽을 이루는 우수한 포인트가드로 단신임에도 파워있는 플레이와 돌파력이 일품이었다. 홍사붕(현 SK)은 슈팅가드와 포인트 가드를 오가는 전천후 선수였고, 조동기(전 모비스, 은퇴)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리바운드와 블록슛에 능한 수비형 센터였다.
중앙대는 골밑이 다소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강한 체력과 스피드를 앞세운 공격농구를 펼쳤고, 외곽 공격력은거의 연세대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했다. 전반적으로 압도적인 느낌은 부족하지만, 모든 포지션의 선수가 나름대로 균형이 잡힌 안정감있는 팀이었다.
더구나 중앙대의 감독은 당시 최연소 감독이자, 기아에서 선수생활을 치렀던 강정수 감독(현재 중앙대 감독으로 복귀)이었다. 이 다부진 느낌의 젊은 감독은 자기편 선수뿐만 아니라 상대팀의 전력과 특성, 공략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영민했다. 그가 전력상 월등히 위였던 기아를 상대로 벌인 체력전은 그대로 적중했다. 중앙대는 수비에서 승부를 걸고, 기아보다 우위에 있는 유일한 요소인 체력을 앞세워 경기 내내 기아 선수들을 압박했다.
당시 기아는 주전 수비수 정덕화의 은퇴공백과 한기범의 부상으로 정규리그 내내 허재, 강동희, 김유택의 3총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채 버텨야 했다. 1차전에서 수비가 완전히 무너지며 중앙대에게 무려 99점이나 내주며 완패한 기아는 2차전에서 분위기를 추스르며, 반전을 노린다.
그러나 기아를 괴롭힌 것은 역시 체력이었다. 이들을 지원해 주었어야 할 천정열, 이훈재 등은 잦은 범실과 공격력 부재로 쉬운 슛도 놓치는 등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잦은 국가대표 차출로 체력과 기량이 저하된 센터 김유택은 플레이오프에서는 하프코트를 넘어가길 힘겨워할 정도로 부진한 모습이 역력했다.
당시 최인선 감독이 무성의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들을 상대로 '고목나무가 서있는 것 같다'고 질타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중앙대는 조동기, 양경민, 김승기의 활약이 돋보였다. 특히 양경민은 해결사 허재를 전담마크하며 3차전에서 그를 17점(당시 허재의 평균득점은 30점에 가까웠다.)으로 막아내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기아는 허재가 막판에야 겨우 살아나며 끈질기게 추격했지만 고비에 그를 받쳐주는 선수가 아무도 없었다.
최인선 감독의 전술상의 미스도 컸던 것이, 조기에 작전타임을 모두 소비하면서도 선수들에게 체력안배를 해주지 못했고 중앙대의 밀착 프레싱에 아무런 대응전술을 보여주지 못했다.
중앙대 승리의 순간, 너무 감동한 탓에 두팔을 뻗쳐들고 환호하다가 실수로 친구의 턱주가리를 올리는 바람에 싸움났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아.. 감동적인 승리여. 이후에도 농구대잔치에서 이런 업셋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연세대의 천하통일
연세대의 플레이오프는 탄탄대로였다. 기업은행과의 8강전에서 주포 문경은이 한 경기 14개의 3점슛, 센터 용가리가 한 경기 10개의 블록을 기록하는 대회 신기록을 작성하면서 연세대는 2승으로 손쉽게 4강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잊혀진 또 하나의 명승부는 연세대와 전통의 라이벌을 구축하고 있는 고려대와 실업 넘버2 삼성전자의 경기였다. 전희철-김병철의 쌍철판을 앞세운 파워농구는 노장팀 삼성을 괴롭혔다.
이때 삼성의 에이스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농구 최고의 슈터 김현준씨다. 고려대는 전력상 앞서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1,2학년이 주축이된 젊은 선수들은 노련함이 부족했고, 위기관리능력도 떨어졌다.
최종 3차전, 78-78 동점인 상황에서 공격권을 가로챈 삼성의 속공. 당황한 고려대 선수들이 고 김현준 선수에게 더블팀이 들어가는 찰나, 노마크였던 선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3점 위닝샷이 터졌다. 삼성의 주전 가드였던 이 사람은, 바로 김진(현 동양 감독).
김진은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누르고 20년만에 한국에 우승컵을 안긴 장본인이자, 전희철, 김병철 등을 이끌고 만년 꼴찌팀 동양 오리온스에 챔피언컵을 안긴 명장이기도 하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게 된 그가 미래에 제자가 될 선수들에게 눈물을 안기는 3점포를 꽂아 넣었으니 운명이라는 것은 참 재미있다.
4강 구도는 연세대- 삼성전자, 상무-중앙대. 최대의 난적으로 예상되었던 고려대와 기아가 모두 탈락하자, 언론에서는 일찌감치 연세대의 전승우승을 예언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4강에서 삼성을 다시 2승으로 제압해버린 연세대는, 일찌감치 결승에 선착했다.
연세대의 결승 파트너로 올라온 팀은 상무였다. 신생팀 SBS 멤버들을 주축으로 정재근(현 KCC), 오성식(현 모비스), 이상범(전 SBS 은퇴) 등 연세대 출신들이 많았던 상무는 정규리그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현대전자, 중앙대 등과 잇달아 3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치르며 힘겹게 올라왔다.
그러나 상무는 연세대의 상대가 아니었다. 포지션 경쟁에서 정재근이 버틴 파워포워드 자리를 제외하고는 우위를 점하는 포지션이 하나도 없었으며, 높이에서는 용가리에게, 외곽에서는 문경은, 우지원을 막지 못하여 계속 밀렸다.
1,2 차전에 시종일관 끌려다니며 완패한 상무의 마지막 전략은 올코트 프레싱으로 인한 파울작전이었다. 당시와 지금의 농구 규칙 중 두드러진 차이 중 하나가 팀 파울 상황에서는 자유투를 2개 주는 것이 아니라, one & one이라고 해서 자유투 1구를 성공하면 다시 2구의 기회를 주고, 놓치면 그대로 인플레이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 작전의 타겟은 당연히 자유투가 부족한 선수들이었고, 당시만 해도 자유투가 쥐약이었던 용가리와 이상민은 경기 내내 무수한 파울을 당해야 했다.
20연승을 달리며 전승 우승에 마지막 1승을 남겨둔 3차전에서 연세대는 아쉽게 상무의 페이스에 말려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무의 1승이 시리즈 전체의 운명을 뒤바꿔 놓지는 못했다. 심기일전한 연세대는 4차전에서 내외곽이 호조를 띄며 초반부터 상무의 진영을 맹폭했다. 높이에서 열세였던 상무는 리바운드 싸움에서 뚜렷한 격차를 드러냈고, 파울 작전이 먹혀들지 않으며 완전히 연세대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
점수 쟁탈전으로 진행된 경기는 시종일관 연세대의 페이스였고, 연세대는 102-96으로 깔끔하게 설욕하며, 마침내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제패라는 신기록을 작성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대회에서 서장훈은 리바운드왕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팀 선배 문경은을 제치고 MVP(최우수선수)에 올라 명실공히 한국농구의 새로운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아.. 연세대. 개인적으로 중앙대 팬이었다. 친구들과 무모하게 우승팀 내기했다가 혼자만 삑사리나서 한 달간 내깃돈 내놓으라는 겐세이들 피해서 도망다녀야 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이런 개인적인 아픔이야 어쨌든, 당시 농구대잔치는 기아 독주시대의 끝과 함께 젊은 팬들의 높은 관심과 성원 속에서 성공적인 대회로 치루어졌다.
부록- 그때 그 시절의 농구해설
월드컵에서 드러났듯이 해설없는 스포츠 관람은 앙꼬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 일터, 축구나 야구에 비해서 큰 유명세를 얻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케이블이나 ESPN도 없던 시절, 묵묵히 코트를 지켜주었던 다수의 명해설가들이 계셨으니.. 농구대잔치를 거론하며 그들의 이름을 빼놓는 것은 크나큰 결례이리라.
KBS- 유희형
KBS는 전통적으로 농구대잔치 중계의 70퍼센트 이상을 독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많은 경기를 중계해주었다. 특히 연세대- 고려대나, 기아-삼성, 혹은 챔피언결정전 같은 빅 이벤트는 거의 다 KBS의 몫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농구 중계의 노하우에서도 앞서 있었고, 경륜있는 스포츠 캐스터들과 해설자들을 내세웠다.
KBS의 간판이라고 할 만한 해설위원은 역시 유희형 할아버님. 언제나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듯한 눈망울과 적당히 퍼진 몸집이 묘한 나른함을 안겨주는 양반. 이 양반의 해설로 인하여 해설에 별로 지식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따금씩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잘한다는 것.
(캐스터) 아 우지원 선수, 자유투 라인에 섰습니다. 자유투가 정확한 선수죠?
(유희형) 그렇습니다. 그리고 혈액형은 A형입니다.
(캐스터) .................????
할말없으면 그냥 과묵하게 계시지. 자유투 던지는 거랑, 혈액형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걸까? 축구의 문선 거사마냥, 혈액형과 스포츠 과학의 연관성에 대해서 설명이나 해주심 또 모를까..
종종 해설가의 본분을 잊고 경기에 몰입하는 무아지경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캐스터) 네, 강동희 선수 가로챘습니다. 역시 손놀림이 빠른 선수에요.
(류희형) ..............(침묵)
(캐스터) 옆구리 찌르며) 오늘, 강동희 선수의 활약을 어떻게 보십니까?
(류희형) 으허허허.. 으허허(주로 할말 없으면 웃어준다.) 네, 코트의 재간동이에요. 재간동이.. 으허허허(선수를 평가해 달라고 하면 주로 '재간동이' 아니면 '부진해요'로 대답이 끝난다.)
논리적이거나 깊이있는 해설과는 상당히 무관했으나 푸근한 어투, 구수한 설렁탕같은 해설로 농구팬들에게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더랬다.
MBC- 방열
MBC는 KBS나 SBS에 비하여 그다지 농구중계에 열성적이지 못한 방송국으로 기억된다. 뚜렷하게 눈에 띄는 농구전문 캐스터나 해설자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주로 기억나는 것은, 방열 해설위원이다.
농구팬들이 다 아시는 것처럼, 여러 차례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기아의 첫 우승을 이끌었으나, 허재로 대표되는 기아선수단의 항명파동 끝에 불명예 퇴진했던 불운의 명장.
전직에 걸맞게 방열 위원의 해설은 가장 감독입장에 가까운, 냉철하고 논리적인 분석을 주된 스타일로 했다. 다만, 기아의 경기를 해설할 때는 다소 냉온탕을 오가는데, 전반전에는 주로 허재를 비롯한 기아 선수들에 비우호적인 해설이 주메뉴를 이룬다면, 후반전에 경기가 격렬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친 기아 쪽으로 해설의 균형이 기우는 것을 느낄수 있다. 별다른 쇼맨쉽이 없어서 다소 지루하긴 했지만, 내용면에서는 꽤 괜찮은 해설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다만, 짜증나는건 담당 캐스터들. 당시에는 도대체 농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캐스터가 어떻게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압권이었던 것은 지난 월드컵때 축구해설을 주로 맡았던 임주완 아나운서.
선수 이름을 못외워서 네, '몇 번 공 몰고 갑니다.' '네, 몇 번에게 패스, 슛, 골인이군요'로 끝내기가 일쑤고, 지역방어를 맨투맨이라고 하질 않나. 2점슛과 3점슛을 몇 차례나 헷갈리지 않나, 다수의 생쑈를 보였던 것이 기억난다.
SBS- 한창도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진정한 농구마니아라면 이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당연지사. 한마디로 농구계의 송좌익 이라할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해설로 유명하신 양반이었다.
한창도 해설위원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NBA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당시 SBS만이 방송3사 중 유일하게 NBA 리뷰를 방영해주고 있었고, 그를 통해 한창도식 본토 영어의 진수가 소개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제발 좀 귀에 거슬리는 민망한 영어발음 좀 안하기를 학수고대 하면서..
그냥 한국식 영어로 조던이라고 발음하면 될 걸, 철저한 스펠링 원리주의자로 조던(Jordan)을 '졸던'이라고 굴려서 발음하는 용기, 2-3 지역방어라고 우리말로 해도 될 걸, 튜(two)- 뜨리(three) 좌~안(zone) 디펜스라고 꼬아주는 굳은 심지, 그러면서 본토스럽지 못한 발음을 과도하게 굴절시키는 이경규식 영어를 되게 선호하는 당신이셨다.
NBA 중계를 하던 시절 선수들이 위를 쳐다보면 항상 했던 말씀 "시청자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NBA경기장엔 전광판이 천장에 달려있어서 선수들이 그걸 보는거다..쓸데없이 위를 보는게 아니다"라고 NBA경기장 가봤던걸 자랑하시곤 하셨다.
상황해설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유감없이 발휘하셔서 팔꿈치에 안면을 맞아 다운된 선수를 가리켜 '아, 저 선수 하체가 부실해요.'.. 경기 중 잡담하다가, 긴박한 상황으로 바뀌더라도 자기가 하던 말은 나중에라도 끝내고 마는.. '네, 방금 제가 말씀드렸던 것을 다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불굴의 해설정신을 보여주심으로써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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