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2 일요일
추억의농구디비기우원회
농구대잔치, 추억의 이름
농구대잔치를 기억하시는가? 지금 KBL(한국프로농구리그)이 시즌 중인 것은 알아도 아마농구 최대의 제전인 농구대잔치 역시 치러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거다.
텅빈 관중석, 썰렁한 장충체육관에서 지금은 대학팀들 속에 군인팀 상무가 꼽사리껴서 진행되는 2류 대회가 되고 말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농구대잔치는 명실공히 한국농구를 대표하는 최대규모의 스포츠제전이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외국인 선수덜이 보여주는 호쾌한 덩크슛도 없었고, 프로리그도 아닌 아마추어 농구였지만, 대학팀과 실업팀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패권을 다투던 그 시절.. 객석은 관중들로 꽉 찼고, 꽃미남 스타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청소년팬들로 경기장은 유명 가수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다.
3점과 속공으로 대표되는 아기자기한 농구는 지금의 프로농구만큼의 파워는 없어도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의 향취가 있었던 것이다.
가끔 덩크도 없지는 않았다. 동방예의지국이기에 마크맨이 있을 때는 감히 상대 머리 위에서 올라서지 못하고, 노마크일 때만 한번 기회가 오면 경건히 두 손을 모아 죽을 힘을 다해 내려찍는 겸손한 덩크를 보며 나는 농구에서의 예의를 배웠고, 2점슛 찬스에서조차 꼭 라인 밖으로 나와서 3점을 쌔리고야 마는 배짱에 한민족의 긍지를 느꼈음이다.
그러던 것이 프로농구가 시작되면서, 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용병이라는 이름의 양넘들을 보면서 그 수준에 놀라서? 아니, 절대 아니다. 내가 아무리 순진했기로서니 농구라는 운동이 동양인보다 서양인, 황인보다 흑인에게 더 유리한 운동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과욕부리지 않았더랬다.
그러나 나를 경악케 만든 것은 바로 우리가 그토록 자랑하고 환호하던 우리의 스타들..
국내에서 적수가 없이 온갖 농구 묘기를 보여주던 애들이 프로농구가 시작되며 시커먼 애덜과 부딪치자 튕겨 나가고 자빠지고 드리블 쇼하다가 공 뺏기고, 덩크하는 용병들 아래에서 멍하니 쳐다보고.. 평범한 선수들이었으면 말을 안 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들이 말이다.
세월이 흘러 KBL이 개막한지도 어언 7년. 나 역시 프로의 출범과 외국인 선수의 등장이 한국농구의 성장을 가져다준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무턱대고 '아! 옛날이여'를 외쳐대는 복고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나 다소 졸속으로 시행된 프로농구 출범이 가져다준 부작용(아마농구의 쇠락, 국내스타들의 고사)이 우리만의 색깔을 빼앗아간 것은 지금까지도 뼈아프게 느껴진다.
서두에서도 말했듯이 그 때의 농구대잔치에는 비록 외적인 화려함은 프로농구에 비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만의 색깔이 살아 있었다. 덩크는 조잡하고 탄력이 부족했을지언정, 그 시절의 농구에는 한국 농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팬들은 환호했고, 빅 매치가 있는 날에는 체육관이 꽉꽉 들어차곤 했다. 아직도 농구 올드팬들 중에는 지금의 프로농구보다 농구대잔치의 추억을 더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처럼 외국인 선수 한 두 명의 활약에 의하여 팀의 희비가 엇갈리며, 감독은 일이 안 풀리면 전술 돌아볼 생각은 안하고 외국인 선수 타령만 해대는 답답한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농구를 주도하고 우리가 승부를 결정짓던 그 시절의 추억이 그리워진다.
프로농구 출범 이후 아마시절의 스타들과 기록들은 홀대받고 있고, 잊혀진 과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쉬운 마음에 헌정의 글을 올려본다.
왜 90년대인가?- 10대들을 강타한 농구신드롬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 나와와 마찬가지로 90년대 초반에 중·고교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아마 당시의 농구 신드롬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내가 처음 농구라는 스포츠의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바다 건너 일본에서 건너온 '슬램덩크'라고 하는 한 권의 만화에서 시작되었다.
다분히 후까시 만땅의 일본 양아들을 내세운(이걸 한국만화라고 알고 있는 놈도 생각보다 많았다. 흐흐) 학원 폭력물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오프닝으로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차츰 농구라는 스포츠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박진감 있는 농구드라마로 변하여 간다.
슬램덩크가 가지고 있는 미덕은 개성만점의 캐릭터와 탄탄한 구조의 이야기 전개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농구라는 스포츠가 가지고 있는 복잡미묘한 재미(각종 전술이나, 경기 중 선수들의 심리상태)를 관객들에게 이입시키는 데 성공했다는데 있다고 하겠다.
'내일은 조'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쓸데없는 열혈남아들이 그득히 등장해서 이건 뭐 스포츠에 대한 과학적 이해도 없고, 선수들 심리에 대한 묘사도 없이, 독기 치켜뜬 눈으로 섬 같은 데 갇혀서 무식하게 연습 (과학적 훈련? 조또, 완전히 원시인 사냥훈련이면 모를까) 해서 세계 최정상에 이른다..
뭐 이딴 식의 허무맹랑한 스토리가 아니라, 스포츠에서 기본기의 중요성, 승자와 패자의 모습, 한 경기 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상황들과 선수들의 심리변화 등을 그려내는 모습들.. 그 종목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으면 불가능할 정도의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슬램덩크의 등장인물들은 주인공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팀의 인물들까지도 실제 농구선수 못지 않은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강백호, 서태웅, 윤대협, 이정환..
실제 NBA 선수들을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이들 캐릭터들은 인기 상한가를 달리고, 교실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슬램덩크를 주제로 해서 이야기꽃이 만발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농구가 화제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방송에서는 농구를 소재로 하여 '마지막 승부'라는 티비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둘 다 나이 30이 넘은 아자씨들이지만, 당시만 해도 뽀송뽀송하던 장달건과 '장모 카지노 대박'으로 기억되는 삼지창이 주연을 맡은 이 드라마는, 당시의 농구붐과 주연배우들의 호화 캐스팅에 힘입어 꽤 인기를 끌기도 했다. (나는 농구보다 심운하의 연예계 데뷔작이란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어울리지도 않는 고글을 쓰고 허접한 폼으로 3점슛을 던져대는 삼지창이 대학 최고의 슈터로 등장한다거나, 레이업 하나 성공하고서 필요 이상으로 괴성을 질러대는 장달건의 가드 역할이나 민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 작품이 절대 해외 수출되는 일이 없기를 바랬다.)
바다 건너 농구의 본고장에서는 어떠하였는가?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NBA는 우리에게 그다지 보편화되지 않고, 소수의 마니아들에게만 알려졌었다. 그러나 마이클 조대인이 역사의 중심에 나서면서 대인의 환상적인 쇼타임은 한국의 중고딩 아해들에게까지 농구 바이러스를 전파시키는데 일조했다.
90년대 초반은 조대인이 시카고 불스를 이끌고 첫 3연패를 이루던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의 중고딩 아해들에게도 조대인은 우상이었고, 23번을 새긴 티셔츠, 조대인의 얼굴이 새겨진 책받침 등은 인기품목이었다. 조대인과 더불어 바클리, 유잉, 매직 존슨 등의 NBA 스타들은 국내에서 본토 못지 않은 큰 인기를 끌었던 장본인들이다.
이런 국내외적인 농구붐과 더불어 한국농구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것은 역시 대학농구였다. 90년대는 한국농구에 있어서 세대교체의 시기였고,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90년대 초반 학번들로 구성된 대학 농구의 돌풍이었다.
연세대의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 고려대의 전희철, 현주엽, 중앙대의 김영만, 양경민 등 지금 프로농구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20∼30세대가 모두 이 시절에 등장하였으며, 이것은 80년대 후반부터 지속된 허-동-택으로 대표되던 기아 다이너스티의 독주에 제동을 걸던 일대 센세이션이기도 했다.
90년대의 농구대잔치 판도
90년대는 기아 다이너스티의 독주와 대학농구의 성장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80년대 중반까지 확실한 양강를 형성하고 있던 실업의 삼성VS 현대 구도를 무너뜨린 것은 중앙대 OB팀으로 일컬어지며 혜성처럼 등장한 기아호의 출범이었다.
이미 중앙대 시절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준우승을 일궈내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던 멤버덜이 기아자동차에 다시 집결하면서, 농구판도는 일거에 재편되기에 이른다.
88년부터 93년까지 농구대잔치를 5연패하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세운 그덜은 명실공히 한국농구 역대 최강이었고, 기존의 현대 삼성은 2위권을 다투는 들러리로 전락하며 기아 독주시대가 활짝 열렸다.
허재-강동희-김유택-한기범 등 각 포지션마다 리그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선수덜로 구성된 기아는 준 국가대표팀이라는 명성 그대로 도저히 그덜을 넘볼 적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 팀의 탄생 자체가 형평성의 문제로 따지자면 극히 부조리한 것이었다. 요즘 NBA로 친다면 오닐-던컨-아이버슨-키드가 한 팀에서 뛰는 팀이 말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배구의 삼성화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한 팀의 독주가 지나치게 오래 이어지다 보면 필연적으로 리그는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기 쉽다. 기아의 독주가 길어짐과 동시에 타 팀들의 세대교체가 늦어졌고, 실업은 점차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이 분위기를 반전시키며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대학세의 성장이다. 80년대 중앙대가 독주해오던 대학의 판도는 90년대 들어 연세대와 고려대가 본격적인 스카우트 전쟁에 뛰어들면서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전례 없이 우수한 선수덜이 무더기로 등장했던 시기로, 대학의 빅3로 불리던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는 물론이고, 중위권을 형성하던 경희대, 한양대, 명지대 등에서도 90년을 기점으로 해서 우수선수덜의 영입으로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덜 90년대 초반 학번덜이 바로 현재까지도 프로농구의 핵심 축을 이루는 선수덜인 것이다.
이들의 성장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본격적인 세대교체의 바람이었다. 기아 독주 이후로 한동안 정체되어있는 실업농구계는 이들 대학의 성장에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대학의 평균전력이 실업계를 능가하게 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바야흐로 90년대는 기아VS나머지 떨거지가 아닌, 대학VS실업의 분명한 경쟁구도로 접어들게 된다.
90년대의 대학팀들
연새대
90년대 최고의 대학팀을 꼽으라면 역시 연세대가 가장 한발 앞서 있다.
전통적으로 우수한 포워드와 가드를 많이 보유했던 연세대는 문경은, 김재훈, 김도완(90학번), 이상민, 김성헌(91학번), 우지원, 김훈, 석주일(92학번) 등 수준급 스코어러와 가드들을 영입하며 천천히 전력을 업그레이드 시켜나가고 있었다.
그 바탕에는 선수들의 개인적 능력치를 극대화시키는 최희암 감독(현 모비스)의 분업농구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실업팀, 특히 최강 기아자동차에 강한 모습을 보였던 연세대는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학의 패자를 넘어서 대학팀 최초의 농구대잔치 우승에 도전할만한 팀으로 성장해 있었다.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바로 현역 리그 최고의 스타인 당시 휘문고 3학년 용가리(서장훈, 93학번)를 잡은 데 성공한 것이다. 용가리의 영입은 연세대의 아킬레스였던 정통 센터의 부재를 단숨에 해결했으며, 연세대는 이후 전통의 라이벌인 고려대, 중앙대를 제치고 명실공히 90년대 최고의 팀으로 재탄생 할 수 있었다.
고려대
연세대와 함께 90년대 대학농구를 양분했던 고려대는 압도적인 스카우트로 선수층의 깊이는 연세대를 능가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고려대는 한 때 침체기를 거쳤으나 90년대 들어 고교랭킹 1,2위들을 거의 매년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공격적인 전력보강에 나섰다.
경복고의 에이스 전희철과 용산고 김병철(이상 92학번)을 잡기 시작하면서 이후로 박재헌, 박훈근, 노기석(93학번) 현주엽과 신기성(94학번), 이규섭과 이정래(96학번) 등 주목받는 콤비플레이어들을 대거 양산해냈다.
선수층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말해주는 일화로 경희대 최부영 감독은 고려대 멤버들을 그대로 준다면 팀을 2개 만들어서 결승에서 만나게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으며, 95년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는 당시 최강이었던 고려대에서 베스트5도 모자라 6명씩이나 선발되어, 대표팀이냐 고려대 단일팀이냐를 놓고 멤버 선정에서 잡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압도적인 선수층을 바탕으로 고려대는 연세대, 기아 등과 명승부를 벌이며 90년대 농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중앙대
80년대를 장악했던 중앙대는 허재 세대의 졸업 이후로, 연세대와 고려대의 스카우트 전쟁에서 다소 밀리는 듯 했으나 김승기, 홍사붕, 조동기(90학번), 김영만, 양경민(91학번) 등 좋은 선수들이 꾸준히 제몫을 다하면서 연세, 고려대와 함께 대학 3위권 이내의 성적을 꾸준히 유지하였다.
중앙대는 전통적으로 우수한 센터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수비와 기본기가 잘 갖춰져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들을 많이 보유한 탓에 쉽게 지지 않는 끈끈한 농구를 자랑하였다. 중앙대는 이런 근성을 바탕으로 전력 상 열세의 경기도 여러 차례 뒤집는 이변을 자주 연출하였다.
기타
재력과 네임밸류를 앞세운 소수 대학들이 고교 선수들을 싹쓸이하면서 대학간의 선수 불균형이 심화되는 폐해도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이들 빅3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중하위권팀들 역시 세대교체의 바람 아래서 들러리가 아닌 확실한 색깔을 가진 농구를 보여주면서 차별화에 성공했다. 더구나, 이들 중위권 대학팀에서도 예상치 못한 걸출한 스타들이 대거 배출되면서 농구대잔치의 이변을 주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성원-조성훈의 명지대, 추승균-이흥섭의 한양대, 최명도-윤영필의 경희대 등이며, 이들은 빅3와 더불어 대학농구의 업그레이드를 가져왔고, 이것은 실업에 있어서 거대한 위협이었다.
90년대의 실업판도
5년 연속 농구대잔치 패권을 차지한 기아의 명성은 9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기아는 유재학, 강정수, 정덕화 등 우수한 롤 플레이어덜이 부상과 체력부담 등으로 조기 은퇴하면서 차츰 전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전력의 핵심 축을 이루던 허재-강동희-김유택은 잦은 대표팀 차출과 혹사로 90년대 들어 뚜렷한 조로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허재의 경우, 과도한 음주도 한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몇 년간 선수보강의 실패는 주전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실업에서는 이런 기아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들을 따라잡을 만한 팀이 없었다.
2위권을 형성하였던 것은 전통의 양강 삼성과 현대, 그리고 90년대 들어서 새롭게 가세한 신생팀 SBS였다. 그러나 삼성과 현대는 세대교체의 타이밍을 놓친 탓에 90년대 들어서 변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퇴보하는 중이었고, SBS는 창단 초기에 반짝 돌풍을 일으켰으나, 이후 주전덜이 대거 군입대를 하게 되면서 오히려 약체로 전락했다.
기업은행, 한국은행, 산업은행으로 불리는 금융 3개 팀은 소위 전통적인 '동네북 브러더스'로 대기업 구단에 밀려서 우수 선수 수급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각 대학팀에서 스카우트하고 남은 선수덜을 모아서 팀 사정을 꾸리는 어려운 환경적 제약 탓에 90년대 되어서도 강팀들의 승수쌓기 제물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대학세의 괄목할 만한 성장이 두드러지면서는 플오 진출의 하위시드도 장담하지 못할 만큼 도태된 팀으로 남았다.
이런 단조로운 농구대잔치 판도에서 매년 최대의 변수가 되었던 팀은 바로 군바리팀인 상무의 존재였다. 우수한 운동선수덜이 병역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창단된 불사조 상무는 프로가 없었던 당시에 농구대잔치에 참가해서 기존 팀덜과 자웅을 겨루는 것이 가능했다. 때문에 그해 입대한 선수층에 따라서 막강한 전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덜은 대개 24∼26세의 한창 그 기량이 절정기에 도달할 시기의 선수덜로, 좀처럼 보기 힘든 연합군적인 성격으로 조직력에는 다소 문제가 있었으나, 매년 색다른 멤버를 구경할 수 있다는 것, 유명스타덜이 머리 깎고 '악으로 깡으로'를 외치며 군바리 정신을 구현하는 것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실업의 전력이 크게 하락한 가운데, 90년대 꽃미남 스타덜을 중심으로 한 대학세의 눈부신 성장은 세대교체 바람과 함께 국내에 농구열풍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결과 거의 모든 팀이 한번씩 대학팀에게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 대학의 평균전력이 실업 형님덜을 압도하는 웃지 못할 일이 빈번하게 벌어졌고, 우승컵을 놓고 오직 기아만이 외롭게, 연세대-고려대의 줄기찬 도전에 수성을 하는 형태로 진행된 것이 90년대 농구대잔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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