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 재학시절인 93년부터 수배를 받아오던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 동지는 97년 경찰의 과잉검거 작전으로 인해 97년 9월 15일 밤 아파트에서 추락해 운명했다. 경찰은 동지가 학교 후배 집인 광주시 청암아파트 1308호에 은신해 있던 도중, 15일 밤 11시 50분경 동지를 연행하기 위해 전남도경찰청 보안수사대와 경찰청 기동수사대 형사 24여명이 들이닥치자 13층 높이에서 케이블선을 타고 탈출하다 추락하여 다음날 새벽에 운명한 것으로 발표했다. 이에 검찰은 사건의 조기종결 방침에 따라 16일 오전 10시경 경황이 없을 부모님에게서 부검 합의서를 받아내고 바로 부검을 실시했다. 동지의 죽음은 96년 이후 계속되어온 한총련 와해, 말살 책동으로 대변되는 공안탄압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인권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합법적인 절차과정을 무시한 경찰의 폭력적인 과잉검거작전의 결과였다.
| 김 철 수 (당시 18세) |
|
1973년 3월 전남 보성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91년, 5월 항쟁 11주년 기념일이자 강경대 열사의 장례 행렬이 망월동으로 향할 때 보성고 학생회 주최로 열린 5·18 기념행사를 치루던 도중 김철수 동지는 운동장에서 온몸에 불을 붙인 채 '노태우정권 퇴진'을 외치며 행사장으로 달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잘못된 교육을 계속 받을래?"라고 외치며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우리의 소원'을 친구들에게 불러 달라고 했다. 동지는 유서로 보이는 타고 남은 종이에 노태우 정권의 퇴진과 참교육 실천을 위해 기성세대의 깨달음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동지는 결국 분신 2주만인 6월 1일 운명하였다. |
| 김 태 훈 (당시 22세) |
|
1959년 4월 13일 광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독실한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김태훈 동지는 서울대에 입학한 후 EHSA라는 써클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했다. 고향 광주에서 대학살 만행이 자행되고 이에 대한 학내 시위가 잦아지자 평소 말이 없던 동지는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동지가 투신하던 그날도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도서관에서 원서를 번역하고 있던 동지는 창너머로 침묵시위를 벌이는 학우들이 무수한 경찰과 사복형사들에게 구타당하며,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도서관과 아크로폴리스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노래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던 그 때 동지는 도서관 6층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라고 구호를 외치고 자신의 몸을 던졌다. 학원이 온통 중무장한 사복경찰로 채워지고 폭력과 체포, 위협의 눈초리에 숨조차 막히던 그 때, 분노, 두려움, 부끄러움이 뒤섞인 채 싸움이 사그러져 갈 때, 동지는 핸드마이크도, 유인물도 가지지 않은 빈 몸으로 몸을 던져 우리를 일깨운 것이다. |
남 태 현 (당시 22세) |
| |
1967년 8월 30일 충남 아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남현태 동지는 조국이 제국주의자들과 독재의 무리에게 빼앗긴 이래로 학원이 식민지 노예를 길러내는 곳으로 기능해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상과 학문연구에 대한 자유는 철저히 말살되어 왔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권리, 우리가 낸 등록금을 우리가 편성할 권리를 갖기 위한 의로운 투쟁도 학교 당국과 어용교수들의 탄압으로 좌절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1989년 4월 7일, "기성회비 사용내용 공개, 예·결산시 학생대표 참여" 문제로 학원민주화 투쟁을 전개하던 당시 서울교대에서 삭발·단식·수업거부 투쟁 등이 부분적 승리로 그치고 정리되려 하자, 동지는 "조국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교대인이여 깨어나라!"는 혈서로 쓴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동지는 미제와 군부독재, 이들에 기생하여 살고 있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첨병인 학교당국과 어용, 무능교수들의 가슴에 비수로써 꽂혔던 것이다. |
| 남 현 진 (당시 21세) |
|
1970년 2월 22일 경북 예천에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남현진 동지는 한국외대 총학생회 사회부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히 학생운동을 벌이다, 1990년 11월 19일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자대배치를 받은 지 얼마되지 않은 2월 3일, 부대 밖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되었다. 군 부대에서는 동지의 죽음을 자살이라 하였다. 그러나 훈련소 퇴소 후 자대를 배치 받은 10일 동안 동지의 행적이 묘연하고, 내무반에서 이창호 하사(분대장)와 나눈 대화에서 "남북이 통일되면 그때 우리의 적은 누가 되는가?"라는 질문에 "우리의 적은 미국이다"라고 말했다는 등으로 볼 때, 남현진 동지가 재학 중 총학생회 간부임을 안 기무사에서 조사가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물리력, 협박, 프락치 강요 등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게다가 1월 5일자 발송되지 않은 편지에는 유가족에게 자신의 안전을 확인해 달라는 내용이 있었고, 동기생들이 사건 직후 감금되어 나타나지 않은 일등도 의혹을 더해주는 것이다. |
노 수 석 (당시 20세) |
| |
1976년 11월 23일 광주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노수석 동지는 96년 3월 29일 종로5가에서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확보를 위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결의대회'에 참가한 후 경찰에 쫓겨 달아나던 중 을지로 5가 인쇄골목에 있는 대현문화사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을 거두었다. 이날 시위는 초반부터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대열이 형성되지 못하고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쫓겨다니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특히 대열 내부에까지 백골단이 들어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패고, 3백 52명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부상당했다. 이날 가장 많은 연행과 구타가 자행된 을지로 5가 천지호텔 주변 인쇄골목 앞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으며,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경찰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연행당하는 학생들을 일부 구해내기도 했다. 당시 노수석 동지도 그 장소에서 피신차 들어간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
| 노 철 승 (당시 22세) |
|
1965년 3월 5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노철승 동지는 군복무를 마치기 위해 1985년 6월 26일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무선통신사 면허를 소지하였기 때문에 수도방위사로 차출되었다. 수도방위사에서 근무하던 중 상급자들로부터 기합, 구타 등으로 다리를 다쳤기에 86년 4월 19일 수도통합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다. 1986년 11월 14일 광주병원에서 후송치료 중 1987년 2월 15일 수도방위사로 원대 복귀하였으나, 87년 3월 1일 8시 50분에 특정 지역(청와대 뒷산) 삼일초소 남방 450미터 지점에서 총탄 2발을 머리에 맞고 운명하였다. 당시 동지의 형이 조선대학교 철학과 재학 중 군에 입대한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어서, 특수부대에 근무하면서 형과 내통한다고 보안부대에 끌려가서 심한 고문을 받다 운명한 것으로 추정된다. |
| 류 재 을 (당시 20세) |
|
1977년 11월 광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류재을 동지는 김영삼 정부의 총체적인 부정, 부패, 부도덕, 폭력성에 입각한 반민족 반민중 정권을 응징하기 위해 남총련 주최로 1997년 3월 20일 오후 2시에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개강선포식에 참가하였다. 전경과 학생의 대치 중 사수대에서 깃발을 들고 있던 류재을 동지가 97학번 후배에게 깃발을 넘긴 후 맨 앞에서 전경과 대치하여 투석전을 전개하던 중, 시커먼 물체에 맞고 주춤거리며 뒤로 몇 발자욱을 물러서다가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곧 조선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3시경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이후 한총련 학생들은 2달여 동안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투쟁을 벌였고, 그들 가슴 속에 류재을 열사는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
류 정 하 (당시 25세) 1966년 4월 11일 전남 고흥 출생 동지의 삶과 죽음 류정하 동지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역임시, 학교측의 기만적 태도와 혈서와 삭발로 항의, 학내민주화 투쟁을 주도하다 학교측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제적되었다. 학내 백골단의 새벽침탈로 9명의 동지들과 함께 구속되었다가 출소한 류정하 동지는 수련회 도중 고재욱 동지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구하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갔으나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1986년 신구전문대학교 원예과 입학
1990년 총학생회 총무부장 역임,
1990년 4월 학내 민주화투쟁 주도 혐의로 제적
1990년 5월 13일 학내 침탈로 구속
1990년 12월 영등포 구치소에서 출소
1991년 8월 3일 수련회 동중 가평에서 물에 빠진 동료를 구하려다가 운명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 문 승 필 (당시 19세) |
|
1973년 4월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문승필 동지는 7월 26일 부친상 이후 행방불명되기 전까지 경찰서에서 계속 전화협박을 받았다. 그러다가 10월 14일 밤 12시 동아리 선배를 만난 이후 행방불명된 동지는 11월 2일 단순 열차 사고로 인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문승필 동지가 15일 밤 12시경 갑자기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고, 시신을 광주보훈 병원으로 옮겼고, 신원 확인이 잘 안되어 11월 2일에야 집에 연락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동안 계속 경찰의 협박전화에 시달린 점이나, 현장에서 발견된 유품들이 너무 깨끗한 점, 기차에 치어 죽었는데 시신의 외상이 너무 적고 안경이 왼쪽알만 금이 간 채 별 손상이 없는 점., 유서가 없는 점, 그리고 당시 상황에서 자살할 기미를 전혀 못 느낀 점들로 볼 때 자살이라는 죽음의 원인이 석연치 않다. |
박 래 전 (당시 25세) |
| |
1963년 4월 17일 경기도 화성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80년, 누이의 가슴팍을 도려내고 죄없는 막내동생을 난자한 학살원흉이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권좌에 앉아, 그 피묻은 손으로 '민주'를 떠드는 비극적인 땅! '명예회복-보상' 운운하며 또 다시 광주민중항쟁을 능욕하는 학살원흉 노태우와 '진상조사는 하되 처벌은 원치 않는다'는 보수야당이 피의 광주를 놓고 벌이는 정치야합, 88올림픽의 휘황찬란한 빵빠레 속에 "환경미화"란 미명으로 이땅 민중들의 생존권은 무참히 짓밟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중해방의 신새벽을 앞당기기 위해 싸웠던 박래전 동지는 제 한몸 불살라 학살원흉에게 민주의 불벼락을 내렸다. "저의 뒤로 저와 같은 죽음이 뒤따라서는 안됩니다."라는 절규는 우리 모두의 투쟁을 촉구하며 88년 6월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
박 동 학 (당시 23세) |
| |
1973년 3월 21일 경남 합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대구 공전은 매년 15% 정도의 등록금 인상과 모든 것을 학생의 등록금에 의존하려는 재단측의 비교육적 모습, 대학생이라면 응당 누려야할 기본적인 자치 활동마저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에 총동아리 연합회에서는 96년에 동아리 자치권보장, 지도교수제 폐지, 신규동아리 인정권 등의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였다. 그런데 학교측은 박동학 동지가 각과의 실험실습비 등 여러문제를 걸고 집회에서 사회를 보았다는 트집을 잡으면서 학생자치권 보장을 요구하는 학우 서명지와 7개 요구안을 백지화시켰다. 급기야 동지는 온 몸에 휘발유를 붇고 다시 한 번 학장과 학생과장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의문의 불(학생과장이 불을 붙였다고 동지가 얘기함)이 붙어 96년 5월 8일에 운명하였다. |
| 박 선 영 (당시 21세) |
|
1966년 9월 8일 전남 화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박선영 동지는 85년 서울교대에 입학한 후 수학과 학회 편집부에서 활동하였고, 교대에서의 학교측의 학회와 써클의 해체 조치 이후에는 교회 대학부 연합모임에 참가하면서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서울교대는 전두환 정권 시절에 다른 학교보다도 더 악질적인 교육관료들의 횡포로 인해 학내에 지하 취조실이 있을 정도였고, 동지 또한 문제학생으로 지목을 받던 처지였다. 이런 현실에 맞선 박선영 동지는 자신의 마지막 투쟁을 자결로 표현하였으나, 학교당국은 그런 동지의 죽음조차 이성관계에 의한 자살로 왜곡하는 반인륜적인 작태를 서슴없이 저질렀다. |
박 승 희 (당시 20세) |
| |
1971년 전남 목포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박승희 동지는 고교 재학 중 학생회장에 출마하였고, 전교조와 관련해 사회문제에 일찍 눈을 떳으며, 대학생활로 더욱 더 진지한 모습으로 운동을 고민해 왔다. 1991년 4월 29일, 전남대에서 벌어진 '고 강경대 열사 추모 및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 도중 분신, "2만 학우가 잘 다니는 곳에 묻어 달라. 항상 함께 있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겼으며, 몸의 상태가 호전되자 손가락으로 '노정권 타도. 미국놈들 몰아내자'는 표현을 힘겹게 쓰기도 하며 강인한 투혼을 보이다가 끝내 강경대 동지의 운구가 광주에 도착할 때인 5월 19일 운명, 5월 25일 광주 시민들의 애도 속에 광주망월동 묘지에 영원한 반미구국전사로 잠들었다. |
| 박 종 근 (당시 25세) |
|
1963년 경북 상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박종근 동지의 집안은 부친이 상이군인으로서 경제력이 없어 여동생이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1988년 2월 동국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한의사면허를 획득한 후 방위소집으로 50사단에 배속되어 1988년 6월부터 경주에 있는 중앙동 동사무소에 근무하던 동지는 8월 1일, 아침에 청소를 하던 도중 창고에서 화재가 나 전신에 불이 붙어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운명하였다. 군 검찰 당국은 동지가 개인적인 문제로 분신자살하였다고 발표했으나, 가족의 집요한 노력과 민간진상조사위원회 등이 활동으로 상사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함으로써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올 가능성이 있게 되자 여기에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휘발류를 몸에 뿌려 분신한 데서 발생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독자적인 조사를 통해 어떤 이유에선가 혼수상태에 빠진 후 자살로 조작된 것은 아닌가 라는 의혹을 가지게 되었다. |
박 종 철 (당시 22세) |
| |
1965년 4월 1일 부산 서구 아미동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박종철 동지는 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 의해 연행되었다.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 위함이었다. 결국 14일 오전 11시 20분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았고, 11시 45분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져 있었다. 경찰은 초기 발표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터무니 없는 얘기를 하며 발뺌을 하였으나 시체부검 결과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치안본부는 가담자를 축소하는 등 진상을 은폐, 조작하려 했으나, 천주교 정의평화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미사에서 고문진상을 밝혀내고 3인의 추가가담자를 발표하였다. 이에,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은폐조작 및 호헌선언 반대 범국민대회'를 열었고, 이를 통해 전두환 군사독재 지배체제의 엷은 그물이 산산조각나게 되었고 6·29 선언으로 막을 내렸다. |
| 박 태 영 (당시 20세) |
|
1967년 10월 9일 전남 목포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박태영 동지는 대학신문 수습기자로 일하면서 87년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둔 12월 9일 "오 자유화여, 거국중립내각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친 후 "이 땅의 민족 지성인에겐 행동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억눌림도, 갈라짐도, 분노도, 저항도, 시행착오도, 피흘림도, 여기서 끝냅시다. 民主人本" 이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분신 직전 학내에서 '군부독재 끝장내고 민주 정부 수립하자 ', ' 제도교육 철폐하고 민주교육 실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42일간 단독시위를 하였고 6월 항쟁의 성과로 쟁취한 직선제 개헌과 군정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의 중대과제를 놓고 분열한 민족민주 세력의 단결을 호소하였다 |
| 박 필 호 (당시 21세) |
|
1966년 부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박필호 동지는 1987년 3월 11일 육군 제26사단 의무근무대에 배치받았으며, 동년 3월 19일 아침 6시 20분경 소속 부대 화장실에서 목을 매단 시체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사체는 다리를 변기 속에 넣고 목을 멘 상태였는데,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죽음 직전에 다리를 올려 변기를 짚을 수밖에 없고, 또 목에 난 상처를 보면 줄이 감긴 상처가 3군데나 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목에 줄을 감다가 생긴 상처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족이 도착했을 때는 사체에 피멍이 사라진다는 알콜처리를 하고 난 상태였으며 유서도 없이 3일 후면 가족이 면회가기로 되어있는 상황이라 더욱 의문점이 짙다. 한편 같은 날 아침 동지의 부모들이 죽음을 확인하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부검을 거부한 부모들은 화장에 동의하였다. 동지의 아버지는 말단직 공무원이라 눈물을 머금고 화장을 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 박 현 민 (당시 25세) |
|
1967년 부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87년 6월 항쟁에서 화상을 입기도 한 박현민 동지는 군에서 얻은 심장병으로 의가사 제대를 한 후 복적을 준비하던 중 제적된 사실을 알고 700여 제적생들과 함께 문교부와 학교 당국의 부당한 제적처리에 맞서 복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3월달부터 정문앞 벽글씨 붙이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맡아 하고 재발의 위험을 안고서 며칠동안 밤샘과 무리한 일로 병이 재발하였고 4월 2일 병원에 입원하였다. 입원 중 체온이 40도를 오르내리는 등 상태가 악화되어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뇌사상태에 빠져 결국 학원 자주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였던 학우들과 부모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한 채 세브란스 종합병원에서 운명을 달리 하였다. |
| 박 혜 정 (당시 21세) |
|
1965년 1월 19일 서울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86년 4월 28일 이재호, 김세진 동지가 양키용병교육 결사반대를 외치며 분신하자, 자신의 한계를 딛고 변혁의 길에 동참하기 위해 새로운 열의로 발걸음을 내딛은 동지는 5월 20일 '문익환 목사님 초청 강연회' 도중 교내까지 들어온 전경들과 운집한 학우들 앞에서 이동수 동지가 불덩어리가 되어 투신한 것을 목격하고, "우리 그리고 내 힘이 현 사회를 변혁시키기에는 너무 무력하다"며 괴로워했다. 하루 뒤인 5월 21일 동지는 한강에 몸을 던졌고, 22일 상오10시 30분경 동작대교 부근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진실에 눈을 뜨고 진실을 실천하기 위한 숱한 고민과 몸부림 끝에 동지는 떠나간 것이다. |
손 석 용 (당시 21세) 1970년 경북 영덕에서 출생 동지의 삶과 죽음 특수교육학과 학도로서 장애자들과 함께 할 꿈을 소중히 키워왔던 손석용 동지는 민족민주운동에도 뜻을 같이 하다가 3학년 초에 군에 입대하였다. 평소 미제와 미제의 용병 역할을 하는 군을 혐오해 왔던 동지는 군에서도 동료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껴 고민하였다. 동지는 범민족대회가 열리던 기간인 8월 14일 첫 휴가를 나와서 8월 18일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동지의 모교인 대구대학교 대명동 캠퍼스 야간강좌 옥상에서 분신한 후 투신하여 끝내 마지막 길을 택해 19일 새벽 5시 운명하였다. 운명 즉시 대경총련 산하의 학생들과 지역 민주인사들이 영안실에 집결하여 대책마련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12시 15분경 국군 기무사의 지휘를 받는 백골단과 전경 2개 중대의 침탈에 의해 시신을 탈취당하여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고, 유가족을 회유하여 가족장으로 치루어 버렸다.
1989년 대구 대륜고등학교 졸업
1989년 대구대학교 사범대 특수교육과 입학
1991년 3월 28일 육군에 입대
8월 18일 밤 11시 40분경 대구대 대명동 캠퍼스
야간강좌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
8월 19일 새벽 5시경 대구 동산병원에서 운명
| 송 광 영 (당시 27세) |
|
1958년 10월 3일 전남 광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85년 9월 17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분신을 한 송광영 동지는 "학원악법 철폐하고 독재정권 물러가라!",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질주하다 쓰러졌다. 9월 18일 병상에 찾아온 민주인사와 학생에게 "왜 오셨습니까 오시지 말고 밖에서 싸워 주십시오"라며 투쟁을 독려하였다. 10월 21일 새벽에 운명하였고, 학교에서는 분향소를 설치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분향소를 설치하지 못하고 장례식 또한 경찰의 방해로 영결식 없이 매장하였다. |
송 종 호 (당시 23세) |
| |
1968년 9월 8일 경북 구미에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포병부대에 배치된 동지는 동계훈련 기간 중인 91년 2월 20일 새벽 3시에 이동식 상황실 안에서 벽면에 합판으로 목이 조인 웅크린 자세의 사체로 발견되었다고 군당국은 주장한다. 군당국은 처음 자살로 발표하였다가 이후 안전사 추정으로 정정하였다. 그러나, 갑상선 부위의 혈종은 질식사라기 보다는 일시적 타격에 의한 심장마비일 가능성을 높게 하고 있으며, 질식사일 경우 배변의 흔적이 있어야 하나 그런 점이 발견되지 않고 오른쪽 등에 난 상처와 등과 손, 눈가에 난 화상흔적과 몸 곳곳에 난 멍이 해명되지 않는다. 또한, 함께 박스카 안에 있던 몇 명의 근무자가 밖에서 아크릴 유리창을 깨고 들어갈 때까지 잠을 자고 있었고, 동료들과의 편지가 없어졌고, 수첩 곳곳이 찢어진 점으로 미루어 학내 활동과 관련된 타살로 추정된다. |
신 건 수 (당시 24세) |
| |
1970년 7월 7일 서울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신건수 동지는 불의의 사고로 그토록 갈망했던 이 사회의 진보와 인간이 주인되는 나라를 보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동지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뜻을 대신해 달라는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떠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조용하면서 단호히 맹세한다. 언제나 동지의 마지막 그 눈빛을 아로새기며 살아갈 것을....
| 신 장 호 (당시 21세) |
|
1969년 6월 16일 전북 부안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90년, 광주 항쟁 10주년을 맞아 노태우 정권은 망월동 묘역 참배 및 항쟁 계승 국민대회, 제4기 전대협 출범식 등의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광주로 향하는 시민, 노동자, 학생들을 7천명이나 연행하는 폭거를 자행하며 광주를 봉쇄하고 철통같은 경계망을 펴고 있었다. 이에, 신장호 동지는 후배들과 함께, 이 봉쇄를 뚫고 광주로 들어가려 검문을 피하기 위해 열차에서 뛰어내려 광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열차에서 뛰어내린 신장호 동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고, 과다출혈로 인해 안타깝게도 운명하고 말았다. 신장호 동지의 죽음과 연행과정에서 발생되어진 수많은 부상은 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이며 등장한 5공의 쌍둥이 노태우 민자당 정권의 무분별한 폭력 통치에 그 원인이 있음이 분명하다. |
| 심 광 보 (당시 17세) |
|
1972년 12월 5일 충북 중원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참교육을 열망하는 전교조 선생님의 영향 밑에 독서모임에 참가하며, 사회 의식에 눈을 떴던 동지는 고교 2년 때 가정 형편으로 휴학하였고, 그후에도 노동일을 하며 참교육 실현을 위해 노력을 하던 중 90년 9월 7일 오후 2시20분, 충주시 성서동 김윤택 치과의원 건물 3층 옥상에서 "농민이여, 농민의 깃발을! 노동자여, 노동의 횃불을! 전교조여, 참교육의 함성을!"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 서울 강동병원에서 투병 중 9월 8일 새벽 5시경 운명하였다. |
| 양 영 진 (당시 21세) |
|
1967년 3월 16일 경남 함양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양영진 동지는 88년 10월 조국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이땅의 올바른 문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고민하며, 8월15일 남북학생회담 성사를 위해 지역 선전부 활동을 가열차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군입대로 인해 군의 폭력적 지배 방법, 법적 표현에 미제국주의의 복종, 예속의 한반도 수탈 구조를 실감하고 인간의 뜨거운 피와 순수한 생존 원동력인 열정으로 민족 통일을 조국산하에 뿌리 박기 위해 88년 10월10일 부산대 재료관 옥상에서 "이제 조국 산하에 실하디 실하게 뿌리 박은 진달래가 되고파 하며..."라고 절규한 후 투신하였다. |
오 영 권 (당시 19세) |
| |
1976년 여수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오영권 동지는 학과나 교지편집국 생활에서 보여 주었듯이 매우 모범적이었다. 착하고 고집이 좀 센 편이었으며,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주변이 없지만, 떠듬떠듬 거리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처럼 굽히지 않으려고 했었다. 여순총협 투쟁 중 왼쪽 눈을 실명한 후에도 집안 몰래 교지 활동에도 열성을 보였다. 96년에는 노수석 동지가 운명하였고, 진철원, 황혜인 동지가 분신하였다. 같은 95학번들이 계속 분신, 운명함에도 불구하고, 학원이나 정부는 변한 것이 없자,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같은 학우의 죽음을 아파하였다. 동지는 조국의 현실을, 민중의 고통을 우리에게 말하고, 행동하였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며, 고통스러워하다 우리에게 동지는 자신의 몸을 살라 보여주었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 |
| 오 원 택 (당시 21세) |
|
1974년 전남 장성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오원택 동지는 92년 경기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입학하여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러다 공대 이전 운운하면서 폐쇄하려던 사학비리 주범 손종국과 모리배로 대변되는 재단에서 사주한 유도부의 야구방망이에 맞아 심한 후유증을 호소하였다. 동지는 95년초 입대한 후 운명하였는데 부대에서는 부대 내의 베란다에서 추락하여 숨졌다고 발표했으나 많은 의문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
|
| |
1985년 성균관대학교 경상대학 경영학과 입학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우인수 동지는 낙천적이고 명랑한 성격으로 과학우들과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학생회와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여 동아리회장을 역임하였고, 87년 2월 휴학 후 막노동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피부로 느꼈다. 87년 9월말 입대하여 군복무 중 88년 6월 18일부터 19일까지 1박 2일간의 외박을 나와 같은 동아리의 선,후배들과 음주하다가 귀가 후 19일 08시경 집을 출발, 귀대 후 원인 불명의 사고로 의식을 잃고 사단 의무대, 벽제병원을 거쳐 19일 20시경 국군수도 통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입원 치료 중 6월 24일 오전 6시경 운명하였다. 군당국은 사인을 일사병이라 발표했으나, 20일 입원했음에도 21일에야 가족들에게 연락한 점, 사체를 확인한 부모나, 사체를 옮기던 동료에 의하면 온몸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는 접 등에 비추어 보아 심한 구타로 인한 사망일 가능성이 많다. |
| 우 종 원 (당시 23세) |
|
1962년 경북 의성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우종원 동지는 대학생활 중 이 사회의 심각한 모순과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자기 성찰의 와중에도 항상 주위의 친구들을 다정다감하게 위해줄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85년 8월 예비군 교육 통지서를 받고 대구집에 내려가 훈련을 받고 있다가 자신이 수배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집을 나오게 된다. 그후 소속 불명의 형사 2명이 집에 찾아와서 우종원을 찾았으나 부재 중이어서 되돌아가고, 한달 후인 9월 27일 중앙일보 11면에 삼민투 관련 용의자 수배자 명단에 동지의 이름이 기재된다. 결국 동지는 1985년 10월 11일, 경부선 철로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경부선 하행 열차를 타고 가다가 투신 자살했으며 시체는 다음 날인 12일 아침 철도 선로반원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으나, 동지가 자살을 할 특별한 이유가 없고, 수배중에 변사체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의문점이 많다. |
유 병 진 (당시 22세) |
| |
1966년 충북 옥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유병진 동지는 85년 고려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후 이듬해 동아리인 문예비평에 가입, 각종 세미나 및 유인물 작성, 배포 활동을 하였다. 언제나 환한 미소와 동지들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던 동지는 등록금을 못낸 후배를 위해 자신의 방값을 내어 줄 정도로 희생적이었다. 그러던 동지는 87년 12월 대통령선거 공정감시인단으로 활동하던 중 건물에 불이나 4개월여간의 투병생활 끝에 88년 3월25일 운명하였다. |
윤 재 영 (당시 27세) 1965년 8월 13일 충남 공주군 출생 동지의 삶과 죽음 윤재영 동지와 함께 한 이들은 한결같이 동지에 대해 남의 이야기를 끝까지 귀담아 들어 성급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자세나 사소한 논쟁으로 토론이 맴돌 때는 핵심과 원칙을 이끌어내는 등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아도 그 뜻을 관철할 줄 아는 이였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나 주위 동지들의 생활이나 고민을 놓치지 않고 듣고 이해하고 도우려하는 동지의 헌신적인 노력은 늘 웃음이 끊이지 않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매진해왔던 동지는 주위의 안타까움과 비통함을 뒤로 한 채 짧지만 빛나는 인생을 살아갔다.
1984년 충남대학교 철학과 입학
1987년 충남대학교 총학생회장
1987년 8월 전대협 결성주도
제 1기 전대협 부의장
1987년 12월 12일 12·12반란 규탄대회 투쟁 중 구속
1988년 2월 출소
1989년 수배 중 대전 새길 청년회 창립 주도
1992년 10월10일 노동운동을 하던 중 천식으로 인해 운명
이 경 동 (당시 24세) |
| |
1969년 10월 24일 전남 여천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고민해왔던 이경동 동지는 내성적이면서도 때로는 누구 못지 않게 활발하게 생활했으며, 자치공간의 청소를 도맡아 할 정도로 근면하고 성실하였다. 분신하기 일주일 전, 동지는 이미 자신의 삶을 정리해가고 있었다. 동아리 방에서 책을 정리하며 동기와 후배들이 갖고 싶어하는 책들을 나누어 주었고, 부모님과 할머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는가 하면 강경대 열사를 찾아 갔었고, 5일 일요일 오전에는 망월동에 참배를 다녀왔다. 오후에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과 할머님께 선물을 드리고, 6일 아침 일찍 광주에 올라와서 동기와 후배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7일 저녁에는 10여명의 동기들에게 안부전화와 더불어 열심히 생활해 나가라며 격려하였다. 8일 12시 45분경 음악관 뒷편에서 임용고시철폐, 주한미군 철수와 기만적인 김영삼 정권을 반대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였다. |
| 이 경 환 (당시 19세) |
|
1967년 9월 경기도 양주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6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대성학원에서 재수생활을 하던 이경환 동지는 1986년 6월 서울 청량리 맘모스 호텔 옥상에서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투신했다. 동지의 마지막 일기에서 선생님들을 비롯한 기성세대들의 이기주의와 무관심을 비판하면서 조국 사랑의 순수한 열정으로 사회모순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굶주리는 노동자, 농민들을 걱정하고 미제국주의를 비판하여 핵제물이 되어가는 이 땅에서 할 말을 못해 가슴은 막히고, 듣지 못해 귀는 멀고, 말을 못해 벙어리 되고, 볼 수 없어 눈이 머는 세상을 가슴으로 움켜쥐고 슬퍼하면서 암흑의 땅에 한줄기 호롱불이 되고자 했다. |
| 이 내 창 (당시 27세) |
|
1962년 서울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당시 중앙대 안성교정 총학생회장이던 이내창 동지는 8·15 민족해방일 기념식을 앞둔 89년 8월 14일 오전에 학교로 찾아온 도연주, 백승희 등과 동승하여 남해안 절해고도 거문도 앞바다에서 8월 15일 변사체로 떠올랐다. 도연주는 안기부 인천분실 직원이고, 거문도 주민들의 증언으로 이내창 동지와 도연주, 백승희와 같이 있다가 감쪽같이 섬에서 사라진 사실이 밝혀졌다. 그후 경찰은 이씨의 죽음을 단순 익사로 결론지었으나, 총학생회장으로서 매우 바쁜 일정에 쫒기던 동지가 거문도까지 생명부지의 사람들과 동행해서 간 점, 단순 익사에서는 보기 힘든 7군데의 피하출혈의 흔적 등으로 인해 목적의식적 유인 타살이라는 의문을 남기고 있다 |
이 동 수 (당시 24세) |
| |
1962년 서울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86년 5월 20일 오후 3시 30분경 오월제 행사 가운데 문익환 목사님의 연설 중 학생회관 4층 옥상 난간에서 구호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파쇼의 선봉 전두환을 처단하자", "폭력경찰 물러가라", "미제국주의 물러가라", "어용교수 물러가라" 등을 외치며 이동수 동지가 불덩어리가 되어 떨어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극도의 놀람과 흥분에 휩싸였다. 7m 아래로 떨어져서도 한동안 불길이 오르다가 동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위에 쏟아지는 최루탄의 매운 연기, 폭발음,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아크로폴리스를 향한 곳곳의 통로에서 색색의 헬맷을 쓴 사복 기관원들과 중무장한 전경들이 들이닥쳤다. 극도의 비분에 빠진 학우들은 다시 열을 지어 전경들과 싸웠고 그들은 최루탄이 매서워서가 아니라 조국의 현실이 가슴아파 진한 눈물을 흘렸다. 동지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오후 4시경 운명했다. |
| 이 상 렬 (당시 26세) |
|
1966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이상렬 동지는 상주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나 85년 상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7년 숭실대에 들어오기 전 2년동안을 구로공단의 닭장집에서 노동자의 삶을 걸어왔으며, 1년은 매형의 이발소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숭실대에 입학하자마자 6월 항쟁의 거리를 힘차게 달리면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로 인하여 수배 생활을 겪고 난 후 군에서 3년을 보내고 복학하였다. 동지는 복학한 후에도 야간대학 부학생회장으로 역임하면서 솔선 수범하는 자세로 학우들과 만나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그러던 중 지나친 과로로 자취방에서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
이 승 삼 (당시 21세) |
| |
1966년 부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이승삼 동지는 1986년 12월 16일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1987년 2월 2일에 강원도 원주에 있는 36사단 공병대대에 배치되었다. 부대배치 연락을 받은 동지의 어머니는 2월 16일 잠깐 면회를 하였고, 다시 3월 1일에는 외박을 허락받아 같이 밤을 보냈다. 그런데 헤어진지 이틀 후 가족들에게 동지의 운명소식이 전해졌다. 헌병대에서는 문이 잠겨있던 중대장실에서 동지를 발견했고, 자살한 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나 납득할만한 자살 동기가 없고, M16소총으로 자기 목에 두발을 쏜 뒤 총을 난로 옆에 세워두고 난로가에 앉아 운명하였다는 결론이 나오는 죽음의 상황도 의문이 가는 점이 많다. |
이 윤 성 (당시 19세) |
| |
1964년 1월 3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이윤성 동지는 1981년 성균관대학교 역사철학계열에 입학한 뒤에 진리탐구에 남다른 열정을 품었고, 자신의 주변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 전반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학창생활에 임했다. 2학년때 인문과학연구회라는 써클의 회장직을 맡아 활동하던 중 11월 3일 학생의 날 가두시위 때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인문과학연구회 회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3대독자이고, 시력이 나빠 현역입대가 불가능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7일 새벽에 신체검사도 받지 않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려운 조건에서도 군복무를 하던 동지는 제대를 8일 앞두고 의문을 죽음을 당하였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동지가 북한에서 날려보낸 삐라의 일종인 안전보장증을 가지고 있었던 일로 죽음 직전에 군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군수사기관에서는 조사가 끝난 후 자대로 돌아가 목을 매어 죽었다고 통보했다. |
이 이 동 (당시 21세) |
| |
1966년 4월 전남 광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이이동 동지는 전남대 사범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헌신하다 1987년 입대를 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5일 총격에 의해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군당국은 불행한 가정환경을 비관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병장의 말에 따르면 오후 2시부터 충정교육을 실시했는데, 경비 2중대 중대장이 강연을 하고 나서 "대학생이 데모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할 사람 나와라"했는데 아무도 나가지 않자 이이동 동지를 지목하여 이야기하라고 해서 이야기를 하던 중 중대장이 분개해서 동지를 구타했고 동지가 실신하자 이이동 동지를 엎어 내무반으로 옮겨 한참 후 의식이 회복되고 아프다고 소리치며 고통스럽게 내무반에서 뒹구니까 중대장이 병장을 시켜 업고 중대장이 뒤를 따라 나갔고 그후 28분 정도 지나 총성이 들렸다는 것이다. 사입구가 사출구보다 더 크다는 것과 목격자의 진술이 엇갈리는 것으로 보면 타살당했다 짐작할 수 있다. |
| 이 재 용 (당시 23세) |
|
1964년 10월 7일 경기도 양평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당시 용성총련 호헌철폐 및 군부독재 타도 학생협의회 공동의장으로 그 지치기 쉬운 수배생활 속에서도 늘 승리를 확신하던 이재용 동지는 경찰의 학내 침탈 소식을 듣고 급히 몸을 피하다가 경원대 앞에서 교통사고로 운명하였다. 다음은 동지의 추도식에서 동료가 낭독한 추도사 중의 일부이다. |
이 재 호 (당시 21세) |
| |
1965년 3월 15일 전남 광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86년 4월 28일 아침 서울 관악구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400여명의 서울대 2학년 학생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반전반핵 투쟁위원장 이재호,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 동지는 전방입소 거부투쟁을 지도하던 중 예식장 옆 3층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뿌리며 강제진압하려는 폭력경찰에 경고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폭력경찰의 강제진압 도중, 두 동지는 분신으로써 항거하였다. 이재호 동지는 전신 80%이상의 3도 화상을 입었으며, 김세진 동지는 전신 60%의 3도 화상을 입었다. 이 투쟁을 계기로 반미구국투쟁은 급속히 대중적으로 확산되어 한국의 운동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
| 이 창 환 (당시 23세) |
|
1971년 9월 7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94년 1월 이창환 동지는 옥구군 회현면으로 후배 4명과 겨울농활을 수행하러 갔다가 27일 저녁 같이 식사를 하던 농민 아저씨가 실의에 빠져있는 것을 보고 쌀투쟁의 희망을 주기 위해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배들은 밤 늦게까지 동지가 돌아오지 않자 찾아 나섰고 아저씨의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이창환 동지의 주검이 발견되었고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뇌진탕으로 운명하였거나 실신하여 동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
이 철 규 (당시 24세) 1965년 5월 6일 전남 장성 출생 동지의 삶과 죽음 89년 5월 10일 광주 청옥동 제4수원지에서 얼굴이 검게 변색되고 입가에는 혈흔이 있고 온몸에 구타 흔적과 멍이 든 참혹한 모습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조선대 교지인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으로 이 교지에 '북한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논문을 게재,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지명수배된 조선대생 이철규 동지였다. 이후 증인과 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점들을 정리하면, 5월 3일 행방불명될 시 잠복근무하던 경찰관들에 의해 검거된 것이 거의 확실하며, 그 이후 사체로 발견되기까지의 행방은 알 수가 없으나, 사체의 상태로 보아 수사기관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경찰은 끝내 사건의 은폐에만 혈안이 되어 각종 증거를 조작하고 범국민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억압하여 아직도 사인은 밝혀지고 있지 않다.
1982년 조선대학교 전자공학과 입학
1985년 11월 14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2년형을 선고 받음
1987년 7월 8일 가석방, 3학년으로 재입학
1989년 4월 '민주조선' 발간에 관련, 수배
1989년 5월 3일 행방불명
1989년 5월 10일 변사체로 발견됨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 이 한 열 (당시 21세) |
|
1966년 8월 29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이었던 이한열 동지는 연세대학에 입학하여 광주시민 학살에 대한 사진 전시회, 비디오를 보면서 그리고 학교집회에 참석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사회의 무풍지대에서 살아왔던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이한열 동지는 86년 2학기부터 실천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현실의 중심부에 뛰어들었다. 동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 중 '烈'자가 매울 열이라면서 자신과 최루탄은 불과분의 관계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또 이름의 끝 글자가 같은 김주열군과 자신을 비교하곤 했다. 어쩌면 동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리고 그 곳에 참가한 동지는 그 투쟁 속에서 SY-44 직격 최루탄에 피격당하고 쓰러졌다. 이한열 동지의 피격사건은 전국으로 알려졌으며 학생, 시민들은 분노를 참지 못해 궐기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거대한 87년 6월항쟁의 함성으로 이어졌다. |
| 이 형 관 (당시 25세) |
|
1973년 경기도 성남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군산대 신문 편집장을 맡고 있던 이형관 동지는 94년 체계조차 서 있지 않은 전대기련 전북지부를 일궈내었던 일꾼이었으며, 자기 삶과 사업에 진지한 청년이었다. 쓰러지기 전까지도 원광대 신문사에 가해지는 탄압에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걱정했다. 신문사의 주인으로 서지 못하는 신문사 기자들을 안타까워했고, 대학언론을 탄압하는 주간교수들에게 분노했던 동지는 1997년 9월 3일, 서울에서 회의 후 다급한 마음으로 입과 손의 떨림에도 불구하고 전북 원광대로 향하였고, 그 과정에서 버스터미널에서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이후 동지는 19일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홀로 싸우다 21일 운명하였다. |
| 장 재 완 (당시 22세) |
|
1965년 7월 17일 경남 진양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방위병으로 근무 중이던 장재완 동지는 귀가 도중 민족민주운동의 중요 문건과 책자가 든 가방을 분실하였고, 이것이 보안대에 넘겨진 사실을 알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을 동지들과 조직을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막을 결심을 하였다. "... 본인의 중대한 과오로 인해 조직을 보위하기 위해, 나의 육체적 생명을 단절합니다. 우리의 혁명과 투쟁이 너무나 순결하고 숭고한 것이기에 나의 희생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나의 생명이 다할지라도 혁명을 향한 민중들의 투쟁은 더욱더 가열차게 격렬해질 것입니다..."는 내용의 유서를 부산대 총학생회로 보내고 자결하여 87년 3월 27일 야산에서 등산객에 의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
| 장 현 구 (당시 26세) |
|
1969년 서울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3대 대통령 선거의 정치적 혼란과 재단이 바뀌면서 기업화된 학원 운영과 이에 따른 파행 운영으로 각종 비리와 부정에 가득찬 학원의 비정상적인 운영에 종지부를 찍고 진정 이나라 백년지대계를 위한 학원으로 만들겠다는 의연한 자세로 당시 경원대학교 제9대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장으로서 자주학원 건설을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투쟁했던 장현구 동지는 정부의 시녀로 전락해버린 학교 당국으로부터 터무니없는 고소, 고발로 같이 활동하던 몇몇의 간부들과 같이 성남 경찰서에 고발당하였다. 얼마후 구속 영장도 없이 잠복중이던 성남 경찰서 소속 전담반 형사들과 10여명의 정사복 경찰들에게 폭력적인 방법으로 연행당한 동지는 이 과정에서 고문수사를 하여 정신적 충격을 받게 하였다. 3개월이라는 기간동안 구속 수감되면서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몇차례 자살을 기도하였고, 결국 1995년 12월4일 분신, 운명하였다. |
정 법 영 (당시 18세) |
| |
1960년 6월 충북 청원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정법영 동지는 1973년 청주지역에 도시산업선교가 시작될 무렵 중학생으로 사회선교와 현실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978년 3월 노동자들은 퇴직금문제로 장기적인 농성을 전개하는 과정이었으며 농민 소작인 중 한사람이 토지를 매입하려는 과정에서 뭇매를 맞고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노동자와 농민들은 단식 농성으로 맞서 투쟁하였고 동지도 같이 투쟁에 참여하면서 경찰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민중생존권 수호를 위한 궐기 과정에서 113일이 경과되도록 문제 해결이 안되자 심리적 갈등을 겪던 정법영 동지는 정체불명의 친구들을 몇 번 따라다니며 술을 먹은 적이 있는데 78년 7월 4일에도 정체불명의 친구들과 만난 후 청주 성가의원에 혼자 가서 약을 먹었다면서 치료를 해달라고 했다. 병원에서 가족에게 연락이 와서 가보니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이후 5일간을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한 채 7월 8일 운명하였다. |
| 정 성 묵 (당시 17세) |
|
1973년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90년 6월 4일, 충남 공주고 2년에 재학 중이던 정성묵 동지는 "나의 희생으로 우리 학교에서 우리 학교의 교육방법이,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의 정책에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라는 내용의 유서 5장을 남기고 기숙사에서 음독자결하였다. 당시 동지의 종아리와 등에는 멍든 자국이 있었다. |
| 정 성 희 (당시 20세) |
|
1962년 1월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국민학교 때는 전교 어린이 회장에 뽑힐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으며 고등학교 때부터는 남달리 독서를 많이하여 문학적 소양이 풍부하였고 비교적 과묵하고 조숙한 학생이었던 정성희 동지는 일차 문무대 훈련 당시 시위를 선동, 노래 선창으로 문교부 리스트에 기록되어 강제징집을 당하여 군 복무 중인 82년 7월 23일,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군 당국측에서는 철책 초소 보초경계 근무 중 총기자살로 통고했으며, 유가족에게 자살 동의서를 날인받은 후 간단한 영결예배를 마치고 고양군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하였다. 동지는 유서는 없었고, '또 백양로를 걸어보고 싶다. 죽음 앞에서 내가 이렇게 담담하다니. 윤희(동생)야 네가 배운 지식을 가난하고 병들고 눌린 자들을 위하여 활용해라'라는 낙서 쪽지를 가지고 있었다. |
| 조 성 만 (당시 24세) |
|
1964년 12월 전북 김제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조성만 동지는 광주항쟁 8주기를 맞이하던 88년 5월 15일 명동성당 구내 교육관 4층 옥상에서 할복, 투신했다. 당시 명동 천주교회 청년단체 연합회(명청연) 소속 가톨릭 민속연구회장이었던 조성만 동지는 '양심수 전원 석방 및 수배자 해제 촉구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던 오후 3시30분 무렵 교육관 옥상에 나타나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분단 상황 고착화하는 미제놈들 몰아내자' '올림픽 공동 개최하여 조국 통일 앞당기자' '광주학살 진상규명 노태우를 처단하자' '양심수 전원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5장의 자필 유서를 뿌리고 자신의 배를 찌른 뒤 거꾸로 투신했고, 즉시 백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두개골 손상으로 운명하였다. 동지는 이후에 일어난 통일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하는 계기를 자신의 죽음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
진 성 일 (당시 22세) |
| |
1964년 1월 26일 부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진성일 동지는 중산계층의 여유있는 분위기에서 효성과 형제애가 지극한 장남으로 자랐고, 군입대를 계기로 사회적 인식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12·12 총선에서 특정인과 특정정당에 대한 편파적 흑색선전과 민정당 지지를 강요하자 군에서의 교육에 거부감을 품게 된다. 이를 계기로 5공의 정통성과 도덕성에 대해 심한 반감을 품고 복학한다. 1986년 애학투련의 건대 농성투쟁에서 '황소진압작전'이라는 살인적 테러로 학생들을 진압하고 관제언론에서는 공산혁명분자의 난동이라고 왜곡보도하는 속에서도 침묵뿐인 산업대 학우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86년 11월 5일 "건국대 농성사건에 즈음하여"와 "산대 학우에게"라는 유서를 뿌리고 이 시대의 침묵과 어둠을 사르려 분신, 투신하였다. |
진 철 원 (당시 20세) |
| |
1976년 1월 4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경원대는 91년, 최원영 재단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고질적인 사학비리와 95년 108명 제적 등 무리한 학생 징계, 고발로 사회적 물의를 빚어왔는데, 95년 12월4일 분신 운명한 고 장현구 동지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이 4달 남짓한 상황에서 벌어진 연속적인 분신운명으로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었다. 당시 경원대는 학교당국에 대한 고 장현구 동지 명예회복 요구과정에서 총학생회장, 부학생회장을 비롯한 6명이 제적, 8명이 무기정학, 2명이 유기정학을 당하는 한편 7명의 학우들에 대한 고발 및 공권력 투입으로 95년 총학생회장이 구속을 당하고 나머지 6명의 학우들은 수배상태에 놓여 있었다. 진철원 동지는 고교선배인 고 장현구 동지의 분신운명과 동아리, 학과의 선배동지들이 제적, 고발 등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최원영 재단의 살인적 학원운영에 항거, 분신운명하였다. |
천 세 용 (당시 20세) |
| |
1971년 5월 서울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주경야독을 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살아온 천세용 동지는 [한얼] 만평기자 및 못다한 미술학도의 꿈을 '한얼 민족사 연구회'를 통해 이땅의 현실에 고민하게 되었고 "과학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므로 의식과 실천은 변증법적으로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확신을 변혁운동을 통해 담보해 내려는 노력을 펼쳐 나가다 5월 3일 침체된 학원자주화 투쟁에 불을 당기고자 했다. 동지는 당일 국기 게양대 앞에서 "6월 경원대 단결 투쟁 노태우정권 타도하자."고 외치며 분신 투신하여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운명하였다. |
최 덕 수 (당시 20세) 1968년 전북 정주시 출생 동지의 삶과 죽음 1988년 5월 18일 오전11시경 최덕수 동지는 "광주항쟁진상규명", "국조권 발동"을 외치며 시계탑 앞에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병원에서도 "광주는 아직도 살아있다", "나는 괜찮으니 돌아가서 투쟁하라"고 동료에게 당부하며 분신 9일만에 운명하였다. 87년 민중의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12월)와 국회의원 선거(88년 4월)를 거치면서 정국은 여소야대로 치달으며 각 당의 당리당략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즉 6월 항쟁에도 불구하고 "광주항쟁의 진상규명" "삼청교육대" "언론탑압" "5공화국의 부정비리(6공도 포함)" "전두환촵이순자의 부정비리 소환조사 구속" 등의 진상규명은 허공에 떠 버린 뜬 구름이었다. 이러한 기회주의와 당리당략적인 모습을 보며 최덕수 동지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고통속에서도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87년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법학과 입학
'서도회'써클 가입, 활동, '호남향우회'회장 역임
'동학운동사 연구회'가입, 활동
1988년 1학기 가정형편으로 휴학
1988년 5월 17일 교내 광주영령 추모식에서 광주항쟁 성명서 낭독
1988년 5월 18일 시계 탑 앞에서 11시경 분신
1988년 5월 26일 한강 성심병원에서 분신 9일만에 운명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
| |
1981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학생운동에 헌신해 온 최온순 동지는 83년 3월 29일 시위예비음모 혐의로 5명의 학우와 함께 경찰에 연행되어 1주일간의 조사를 받은 후 강제징집 되었다. 83년 8월 14일, 군에서 최온순 동지의 집으로 급위독이라는 전보를 보내와 가족들이 급히 부대에 가보니 이미 동지의 사체는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이에 가족들은 자살할 리가 없다는 확신을 갖고 영안실에서 1주일간이나 재수사 및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 수사대는 재수사를 하여 고참병과의 말다툼 끝에 피살되었다고 수정 발표, 자살의 오명은 벗겨지고 대전 국군묘지에 시신을 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납득하기 힘든 의문점이 많이 남겨져 있는 동지의 죽음에 다른 강제징집자의 경우처럼 녹화사업을 담당하는 보안대가 개입되었는 지에 여부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
최 우 혁 (당시 21세) |
| |
1966년 3월 4일 서울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대학시절 독재의 억압에 항거하는 스크럼의 대열에 있었고 공장활동을 경험하며 진정한 민중해방운동을 준비했던 최우혁 동지는 1987년 9월 8일 부대 내의 쓰레기 소각장에서 분신하여 국군 덕정병원으로 이송 중 운명하였다. 헌병대는 개인적 고민에 의한 자살이며 유서와 그에 준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육군 과학수사연구소는 일방적인 부검을 시행되었고, 부검결과 왼쪽 손목에는 길이 1.5센티미터, 너비 1밀리미터, 깊이 3밀리미터 정도의 음푹패인 상처가 있었고, 동지의 내장도 깨끗이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군대는 공동 식사를 하는 곳인데 동지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여러 끼를 굶었다. 최우혁 동지의 죽음은 군 당국의 발표대로 개인적인 문제로 고민하다가 분신 자살한 것이 아니다. 군 당국의 허둥지둥하는 모습가운데서 각 사람의 말이 서로 맞지 않았으며, 의혹의 사실이 점점 드러나자 날치기 장례식을 해버리고 가족들에게 협박을 하였다. |
| 최 응 현 (당시 23세) |
|
1969년 8월 29일 경북 울진군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최응현 동지는 한양공대 입학 후 학생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88년에는 전방입소 반대 특위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구속되어 11월에 집행유예로 출소하였다. 이후 총학생회 반미소위원장, 이철규열사 사인규명 노천단식 투쟁 등을 누구보다 앞장서 진행하였다. 동지는 가정형편상 다시 휴학과 복학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변혁운동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다가, 1990년 11월 8일 한양대 교내 건물 옥상에서 민주화투쟁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함을 자책하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하여 운명하였다. |
| 최 종 철 (당시 23세) |
|
1958년 2월 8일 충북 청주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동지는 부산대로 진학하여 곧바로 학생운동에 헌신하였다. 학교시절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여차하면 긴급조치로 잡혀 들어가야 하는 그 암담한 시절에도 동지는 각종 써클을 조직하고 줄기차게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3학년 때인 1979년 10월 박정희 정권을 결정적으로 분쇄하는 역할을 했던 부마항쟁에 앞장섰다가 수배를 받게 되었다. 그후 수배의 몸으로 청주로 돌아와 학교와 청주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바삐 뛰며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지칠 줄 모르고 정열적으로 활동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했던 동지는 80년 5월 쿠데타로 등장한 신군부세력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되어 군사재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감옥생활에서도 가열찬 투사의 모습을 잃지 않았고, 1981년 5월 11일 출감하였으나 수배, 고문, 징역생활에서 얻은 병(신경통)과 싸우다가 출감 4개월도 채 안된 9월 1일 조국의 민주와 통일을 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운명하였다. |
| 한 상 근 (당시 26세) |
|
1971년 전북 김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동지는 의협심이 강해 항상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96년 일본의 독도 망언 이후 민족의 자존심과 자주권을 지키고자 일본 대사관 항의 방문시 홀연 대사관 담을 넘어 한국 청년의 기개를 보여 주기도 했다. 또한 작년 12월 경희대 김형찬 학우가 안기부 요원에 의해 불법연행 당해 경기도 대공분실에서 분신하였을 때 농성단에서 15일 이상 활동을 하였고 날치기 노동 악법, 안기부법 철회 투쟁에 항상 앞장서기도 하였다. 동지는 97년 용인대가 '대학종합평가'를 받게 됨에 따라 총학생회 학원자주화 추진위원회 산하 '대학종합평가인정제소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학교당국과 싸움을 벌이기도 하였다. 결국 2월 10일 새벽 4시 30분경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호소하기 위하여 분신했다. |
| 한 상 용 (당시 23세) |
|
1970년 전남 해남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한상용 동지는 우리들의 삶은 정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며 어렵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려 노력했다. 참된 삶과 주인된 삶에 항상 고민하며 참교육을 갈망하는 예비교사로서 잘못되어 가고 있는 초등교육을 바로 잡고자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투쟁했다. 그러던 동지는 금식을 하고 임용고시 반대투쟁 승리의 염원을 담은 종이학을 접는 등 계속적인 투쟁을 하다가 1993년 11월10일 10시경에 분신하여 전신 3도 화상과 내출혈로 전대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운명하였다. |
| 한 영 현 (당시 21세) |
|
1962년 3월 1일 인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한영현 동지는 한양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어려운 가정활동에도 불구하고 민속문화연구부에 가입, 82년 부천에서 야학 활동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던 83년 1월, 부천 야학에서 활동한 선배의 조사와 함께 동지가 연행되어 구타를 당하며 조사를 받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 후인 4월 1일 수원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아 늑막염으로 극도의 쇠약한 몸이라는 진단을 받았으나, 2일에 경찰서에 오라는 소식을 듣고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2-3주 후에 동지의 옷이 집으로 우송되자 그때야 동지가 강제징집당한 것을 알았다. 1983년 6월 18일에 휴가를 나왔는데 동지의 팔에 철사로 심하게 맞은 듯한 피멍이 선명했다고 한다. "나로 인해 너무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볼 것이며 81학번뿐만 아니라 72학번까지도 여파가 미치는데 아마 커다란 배가 침몰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고, 두개골이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
| 한 희 철 (당시 22세) |
|
1961년 2월 1일 경남 마산에서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한희철 동지는 서울대에 입학 후 카톨릭 학생회와 성남시 대학생연합회, J.O.C, YMCA 등에서 활동을 하다가 휴학 후 입대를 하였다. 그후 82년 12월 1일 보름간의 휴가를 나와 당시 외대 시위주동자로 수배 중인 김무현 동지를 만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게 하기 위해 동사무소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주었는데, 이후 김무현씨가 검거되고, 그 과정에서 편지가 들통나게 된 일로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보안대에서 5일간 취조를 받고 83년 12월 10일 복귀하였으나, 바로 그 다음날인 12월 11일 새벽 4시 30분경, 5사단 문서보관 창고 앞 참호에서 근무를 서던 중 총기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가슴에 난 3각형의 총탄자국과 보안사의 조사 사실을 계속 은폐했던 점으로 의문이 가고, 설령 자살했다 해도 보안사의 녹화사업이 직접적인 원인이 될 것이다. |
| 허 원 근 (당시 22세) |
|
1962년 5월 15일 전남 진도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84년 4월 2일, 전방 GOP부대 중대장 전령병을 하던 허원근 동지가 유류고 뒤에서 총을 가슴좌우측에 각 1발씩, 두부에 1발 등 세발을 맞고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서 군당국은 자살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M16 세발을 그것도 단발로 세번씩이나 쏘아서 자살을 할 수는 없고, 사건 직후 중대장이 세번이나 총성 청취시간을 정정하여 교육을 시켰고, 총성은 두번 밖에 나지 않았다고 하는 점, 탄피의 수가 틀리고, 중대장의 총에 대한 화약검출 실험만을 제외시킨 점, 또한 동지는 다음날 첫 휴가를 나가기로 되어 있던 점 등은 자살이라는 군당국의 발표를 믿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이유에 의해서 중대장 또는 다른 누구에 의해서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
|
| |
1960년 12월 5일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83년 전두환 정권의 학원탄압이 그 도를 더해가자 이에 굴하지 않고 10여회의 교내 및 가두시위가 계속되고 있었고, 그 해 11월 11일, 미 대통령 레이건의 방한이 예정되었다. 이에, 민족이 영원한 외세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독재정권의 확고한 기반이 마련되려는 위급한 상황임을 깨달은 황정하 동지는 '전두환 정권 퇴진, 레이건 방한 저지 투쟁'을 위해 서울대생과 함께 시위 주동을 결정했다. 83년 11월 8일 낮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고자 도서관 6층 창문을 통해 밧줄을 타고 5층 베란다로 내려오려 했던 동지가 창틀에 올라서려 했을 때, 열람실에 진을 치고 있었던 사복경찰과 수위들이 달려들었고, 이에 동지는 추락, 뇌골절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들을 동지의 생명은 아랑곳없이 학생들의 접근을 제지, 시위 주동 동료 학생 체포에만 급급한 채 그대로 방치해 두기까지 했다. |
| 황 혜 인 (당시 20세) |
|
1976년 강원도 고성 출생 | ||
동지의 삶과 죽음 |
| |
1996년 4월 16일 성균관대학교 율전 캠퍼스 학생회관 3층 여학생 화장실에서 물리학과 95학번 황혜인 동지가 분신, 자결하였다. 언론은 황혜인 동지의 죽음을 총선패배에 대한 비관자살로 보도했으나, 동지가 남긴 유서, 글들을 살펴보았을 때 동지는 김영삼정권의 민중탄압에 맞서 노동해방, 민중해방을 위해 더욱 힘차게 투쟁할 것을 살아남은 이들에게 절규하기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바쳐 산화해 간 것이다. |
반대 꽝!!!
'그 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패가망신’ 피하는 車 사고처리 10계명 (0) | 2011.05.06 |
---|---|
[스크랩] "연봉 4000 넘는 친구들도 제가 부럽대요" (0) | 2011.05.04 |
[스크랩] 절하는 법에 대하여. . . (0) | 2011.01.23 |
[스크랩] 배드민턴 잘 치는 법 (0) | 2010.12.16 |
[스크랩] 배드민턴라켓 고르기 (0) | 2010.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