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돈 없어서 죽습니다"
몇년 전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20대 청년 조경행씨가 그런 경우였다. 조씨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작은 식당을 경영하는 누님 아래서 주방 일을 보고 있었다. 용돈이 궁한 그는 누님이 돈을 잘 주지 않자 방에 금고통을 열어 2천 3백원을 꺼냈다. 이때 누님에게 들켰다. 조씨는 엉겁결에 부엌칼로 누님을 찔러 죽였다. 구치소에서 조씨는 몸집도 작고 세상 물정을 통 모르고 애처롭게 보여 '애기'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세상에서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던 그는 구치소 안에서도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아무도 면회 오는 사람이 없어 배고파했다. 사형수는 아무리 바보 같아도 감방을 휘어잡게 되는데 조씨는 너무 앳되고 얼되어 폭력범들로부터 쥐어박히며 지내는 판이었다. 조씨의 신앙자매는 할머니 수녀인 강아라씨였다. 강 수녀가 시키는 대로 조씨는 성경공부를 열심으로 하여 귀여움을 받았다. 아마도 조씨가 귀여움을 받아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으리라고 한다. 조씨는 사형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돗자리 위에 엎어지듯 하면서 대성 통곡을 했다.
"저는 돈 없어서 죽습니다. 변호사 샀으면 이렇게 죽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당황한 것은 곁에서 따라온 교화담당 직원들이었다.
"경행이 왜 이러나" 고 달랬지만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집행관의 인정신문에도 대답을 하지 않고 '흑흑' 흐느낄 뿐이었다. 직원들은 단상의 신부를 불러내려 예배를 보게 했다. 신부와 함께 성가를 부르면서 ?청년은 침작을 되찾았다. 교목직원이 소장에게 손짓 신호를 보내자 소장은 집행명령의 손짓을 했다. 뒤에서 용수를 씌우려 하자 청년은 다급하게 "유언을 하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직원들은 이 호소를 묵살, 서둘러 그를 처형해버렸다.
이 집행에 참여했던 당시 직원은 지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고 했다. 순조로운 집행을 지나치게 추구하다가 보니 마지막 유언까지도 묵살해버린 데 대한 후회인 것이다.
"조경행이의 울음이 아직도 귓전에 쟁쟁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울음이라기보다는 돈에 대한 한이 마지막 자리에서 그렇게 터져나온 것 같았습니다."
교화담당 직원들은 사형수들이 항변하거나 발버둥을 치면, 그것이 그동안의 교화활동에 대한 먹칠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을 해서 당황, 수치심을 느끼고, 그래서 서둘러 집행을 하게 된다고 한다.
지난 1980년. 5월 24일에 처형된 김재규씨도 의연하게 갔다기보다는 이 청년처럼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죽은 축에 든다고 한다. 김씨는 스님의 집례를 거부했으나 두 손으로 꼭 쥔 염주를 굴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나무아미타불을 계속 복창했다. 그는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유언을 했다. 단상에 있었던 사람은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소리였다고 한다.
"…날 죽일 필요가 없잖아. 이건 크게 잘못하는 거야.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의 유언은 조리를 잃고 비방으로 발전해갔다. 유언 도중에 용수를 씌워 뒤에서 싸잡았다. 입과 코의 윤곽이 흰보자기에 찍혀 보일 정도였다. 염주알을 든 두 손이 더욱 급템포로 떨리고 있었다. 꽁꽁 묶인 채 교수대 쪽으로 끌려갔다.
"절대자가 어디 있습니까"
모든 사형수가 종교에 귀의하며 깨끗이 죽어가는 건은 아니다. 사상범일 경우엔 교화가 쉽지 않다. 고중렬씨는 이런 경험담을 썼다(『.서울구치소』, 90쪽).
보안서원과 공비의 경력을 가진 김모란 40대 사형수가 있었다. 나는 윤형중 신부와 함께 그를 수십 번 면담하여 카톨릭에 귀의시키려 했으나 그는 목석이었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김은 그렇게 묻곤 했다.
"그야 간단하지요.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되지요."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입니까?" "
그렇지요."
"믿을 수가 없는데요. 다윈의 진화론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마메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끝없이 계속됐다. 나는 "신을 이해 하려고 하지 말고 믿으려고 하라"고 조르기도 했으나 그는 벽이었다.
1966년 4월 12일 그는 사형집행장에 섰다. 김의 안색은 창백했다.
"가족에게 남길 유언이 있는가." 집행관이 물었다.
"유언을 하면 틀림없이 전달이 됩니까."
"있으면 말하라." 그는 한숨을 몰아쉬더니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말이 없습니다. 다만, 내 가족에게 죄를 많이 짓고 간다고 전해주십시오."
그의 옆에 서 있던 나는 이때 '마지막 기회다'고 생각하고 말했다.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윤 신부님이나 나를 통하여 많이 들어왔으니 잘 알겠지요?"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천주교에서 베푸는 대세(代洗)를 받으시겠습니까7"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대세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형장 앞에 있는 십자가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만 믿으시면 대세를 받을 수 있고, 대세를 받으면 완전히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고 대세를 받으시겠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몸서리쳐지는 침묵이었다.
그렇게 한 10여 분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집행!"이란 명령이 떨어질 것 같았다.
"종교에 귀의할 뜻은 없는가?" 집행관도 권유했다. 김은 그대로 목석이었다. 입을 꼭 다문 채, 얼굴을 정면으로 향한 채, 마치 화석이라도 된 양 반응이 없었다.
"집행!"
드디어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범행부인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몇년 전 공범 9명이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그들 중 5명은 사형확정이 되었다. 5명 중 4명은, 외국에서 구명운동을 벌여 무기로 감형됐다. 나머지 한 명만 그 얼마 뒤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당했다. 천주교를 믿었기 때문에 신부가 고해성사 등 집례를 해주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집례를 받으셔야죠."
직원이 말을 했다. 그는 갑자기 태도를 표변,
"이 세상에 절대자가 어디 있습니까? 예배 같은 형식은 필요없어요!"하고 딱 잘라 집례를 거절하고 죽어갔다. 신부와 교화담당자가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사형수를 많이 겪어 본 직원들은 평범한 인간처럼 사형수도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직원을 대하는 얼굴, 가족을 대하는 얼굴, 여 신도를 대하는 얼굴, 목사를 대하는 얼굴, 그리고 형장에서 죽음을 대하는 얼굴이 각기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1967년 우리쪽 수사관 2명을 사살하고 붙들린 송추 무장간첩 사건의 두 무장간첩은 천주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중 한 명은 "하나님 만세!"를 외 친 뒤 죽음을 맞았다. 유언 때 가끔 전율할 장면이 나타난다. 사형수가 "나는 억울하게 죽습니다"는 말을 남기는 경우다. 그런다고 해서 사형집행이 정지될 리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형수가 그런 말을 할 때 참석한 공무원, 성직자들은 거개가 그의 무고함을 믿게 된다고 한다.
서울구치소의 형장에서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긴 사형수들은 거개가 기독교나 불교에 귀의한 사람들이었다. 기독교 담당들은 가끔 "형장에 나가서 억울하다고 해보았자 아무 쓸모없으니 하느님만 의지하여 깨끗이 가도록 하자"고 달래기도 한다. 사형수가 형장에서 항변하면 그 동안의 교화가 잘못된 것임이 폭로된다고 걱정하는 직원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많은 사형수들은 폐부를 지르는 항변을 남기고 갔다. 천당과 극락을 목전에 두고, 스무 명도 안 되는 관중 앞에서 변명이나 하려고, 또는 그들을 속이려고, 그 귀중한 생의 마지막 몇 분을 쪼개서 그런 항변을 했다고 믿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죽으면서 남기는 말에 진실성이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는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익이 적기 때문이다. 천당이나 극락을 약속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는 마당에 치사한 거짓말을 유언으로 남길 만큼 인간이 간교하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짓 유언은 신을 속이고 영생구원을 훔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심리는 너무나 복잡하다. 재판 때부터 "억울하다, 억울하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보니 관성이 붙어 형장에서까지도 그런 거짓말을 하고 죽을 가능성은 비록 낮다고 해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억울하다는 유언은 그 사형수의 결백증명은 될 수 없다. 다만, 사형선고가 오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실마리가 될 뿐이다. 이 글은 종교인의 입장에서 씌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억울하다"는 유언의 무게를 의식적으로도 가볍게 취급하려고 한다. 그 유언이 무게를 갖게 되는 것은 수사와 재판, 그리고 교도소 생활에서 드러난 사실의 뒷받침을 받을 때다.
1979년 9월 13일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의 돗자리에는 '치정살인범' 오휘웅씨 (당시 34세·미혼)가 앉혀졌다. 통통하고 다부지게 생긴 오씨는 연출되어 구치감 문을 나설 때 낯익은 구치소직원들에게 "감사합니다" "먼저 갑니다"고 인사를 했었다. 이를 보고 직원들은 오씨가 아주 '양순하게 가 줄'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유언이 있으면 하십시오"란 집행관의 말이 떨어지자 오씨는 당당한 말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로 시작된 유언의 끝에서 오씨는 저주를 남겼다.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누구누구에게 원수를 갚겠다는 가슴 서늘한 이야기를 했다. 오씨의 이 유언은 그 집행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충격을 주었다. 나도 그 유언을 전해듣고 감동된 한 사람이며 그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다.
제대로 전달 안되는 유언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가족에게 전달하여 내가 죽은 뒤에라도 누명을 벗겨 주도록 해달라"는 오씨의 유언뿐 아니라 다른 사형수의 유언도 거개가 가족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것은 한국 사형제도의 수준을 상징하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명적과 직원이 사형장에 나와 유언의 기록을 맡고는 있지만, 기록의 정확성은 의문이다. 어느 고참 사형집행 관계자는 "솔직이 말씀드릴까요. 유언은 제대로 전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5,60년대엔 명적과 직원이 끝까지 앉아 있는 것도 못봤다"고 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피를 토하는 듯한 사형수의 마지막 말들이 그렇게 무시된다면 "유언이 있으면 해보시오"란 집행관의 말은 그냥 해보는 소리인가. 그렇게 하기에는 사형수들의 한과 고통, 그리고 그 유언이 그대로 전달되리라 믿고 죽어간 사형수들의 원념이 너무 무겁다. 법무부장관이나구치소장이 이 글을 읽는다면, 앞으로 사형수의 유언은 막지도 말고, 제대로 기록, 그대로 전달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유언 통해 공범의 무고함 고백
『서울구치소』의 저자 고중렬씨는 이런 기억을 갖고 있다.
"60년대말 군산 근방의 전당포에서 강도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붙들려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주범은 김정일(당시 28세) 종범은 김홍조(당시 35세)였어요. 김홍조는 집안 형편도 괜찮고 독자였는데, 자기는 전당포 주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요. 절도를 하러 간 것이지 강도살인을 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고 해요. 김홍조는 바깥에서 망을 봤대요. 김정일이 들어갔다가 주인이 고함치자 찔렀다는 거예요. 김홍조는 고함소리를 듣고 달아나 버렸는데 나중에 신문을 보고서야 김정일이 질러 죽인 사실을 알았다는 겁니다.
김홍조는 계속 억울하다면서 재심청구서나 진정서를 내곤 했어요. 김정일도 서울구치소에 와 있었는데, 그 살인은 다 내가 한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곤 했어요. 김홍조는 감방에서 중병에 걸렸어요. 거의 죽게 됐어요. 치료도 포기한 상태였어요. 신부님을 불러 병자 성사도 받았지요. 그런데 김홍조는 죽어도 깨끗한 몸으로 죽고 싶다고 해요. 그 집념 때문인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됐어요.
얼마 뒤 사형장에 들어갔을 때는 건강한 몸이 돼 있었습니다. 깨끗하게 갔는데 억울하다는 유언은 안하더군요. 그런데, 그보다 30분전에 주범 김정일이 처형됐는데, 그는 모든 것은 다 내가 한 것이다, 김홍조는 죄가 없다, 그의 사형을 면해달라고 애절하게 유언을 하고 죽었죠."
1964년초 두 범인이 강도하러 들어갔다가 일가족 3명을 찔러죽인 사건이 서울에서 있었다. 두 범인 김완선씨 (당시 21세)와 유근창씨 (당시 46세)는 붙들려 둘 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둘은 다 같이 항소했는데, 김씨는 유씨가, 유씨는 김씨가 세 명을 찔러 죽인 것이지 자기는 고함 소리에 달아나 살인을 몰랐다고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었다. 고등법원과 대 법원에선 김씨가 2명, 유씨가 1명을 죽였다는 1심의 판결을 유지, 두 사람은 그대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유씨는 확정 뒤에도 재심청구를 세 번 했고 모두 기각당했다. 유씨는 같은 구치소에 있는 김씨가 이제는 그 자신이 세 명을 모두 죽였다는 실토를 한다고, 재심 이유를 달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두 사람도 같은 날짜에 사형됐다.
정기호씨(1930년생)는 이상옥씨와 함께 승용차 운전수를 살해, 금품을 빼앗은 혐의로 1959년에 다 같이 사형확정 판결을 받았었다. 두 사람은 그 뒤 약 12년간 구치소에서 연명하다가 집행을 당했다. 이 기간에 정씨는 범행 당시 자기는 술에 취하여 승용차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고 죽인 것은 이씨란 내용의 재심청구를 세 번 냈으나 모두 기각당했었다. 이 두 사람도 같은 날에 처형됐다. 이씨는 유언에서 정씨는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밝혔다(고증렬씨의 전언).
고중렬씨는 이외에도 방화살인범이 유언으로 서 "나는 범인이 아닙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기억했다. 오휘웅씨의 경우도 그렇지만 유언에서 억울하게 죽는다는 소리가 많이 나오는 것은 공범관계의 살인 또는 강도살인에서다. 공범관계에선 한쪽이 "저 친구와 같이 죽였다"고 하면 그 친구가 살인을 하지 않았더라도 결백을 입증하기가 엄청나게 어렵다.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는 공범뿐인데다가, 인간의 허약한 심리라는 것이 사형이란 고독한 죽음의 길에 동반자를 원하는 면이 있고, 같이 끌고 들어가려는 유혹이 늘 있기에 더욱 그 '죽음의 깍지낌'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반대로 1심까지는 같이 죽였다고 하여 친구가 사형선고 받게 했다가 2 심에선 "혼자서"했다"고 실토, 친구가 감형받게 한 사례도 더러 있다. 이것은 주범의 말 여하에 따라 종범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무고한 사형의 고전적인 사례가 되어 「나는 살고 싶다」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미국의 어느 살인사건에서도 그 여자는 공범들의 "함께 했다"는 진술에 휘말려 가스실로 들어가고 만 것이었다.
'폭행치사'를 주장한 토막살해범
'억울하다'는 유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오휘웅씨처럼 "나는 그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결백선언 외에 '토막살해범' 이팔국씨처럼 "죄는 지었지만 죽을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형은 억울합니다"는 유언이 있다.
이팔국씨는 사형집행 바로 전날에도 사태를 낙관하는 듯한 이야기를 김수진 목사에게 했다고 한다. 재심청구서를 또 썼는데, 이번엔 자신의 정신 감정을 요청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얼마 전에는 6·25때 받은 금성 무공훈장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제출하면 사형만은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이씨는 "제가 사형만 면하면 평생토록 구치소에서 전도자로 일하겠습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그의 목표는 무죄가 아니라 무기로의 감형이었다. 합기도, 유도, 태권도를 합쳐 12단이란 이씨는 6척 장신의 우람한 체격을 갖고 있었고, 대학원 졸업의 학력을 가진 '토막살해범'이었다.
1977년 11월 이씨의 감방 앞으로 교도관이 들이닥쳤다.
"전방(轉房) 입니다."
"네, 전방이오?"
"그럼 사물을 챙기겠습니다."
"그냥 놔두세요. 담당이 나르도록 할께요."
이씨는 그때 우찌무라(內村)전집을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써 놓고 제출도 못한 재심기각에 대한 항고장도 그대로 두고 교도관을 따라 나섰다. '지옥 3정목'에서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 그는 잠시 숨을 내쉬고 몇 차례 "주님, 주님, 저를 도와 주소서!"라고 약하게 중얼거리더니 사형장을 향해서 총총걸음을 걸어갔다고 한다. 그는 돗자리에 앉자마자 단상의 집행관에게
"저는 재심청구중인데 집행 할 수가 있습니까"고 항의하듯 물었다. 집행관은
"재심청구만으로는 사형 을 연기시키는 데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고 타이르듯 말했다.
그의 유언은 그 취지가 대강 이런 것이었다.
"저는 기독교에 귀의하여 하느님 앞으로 갑니다만 할 이야기는 하고 가야겠습니다. 나는 살인마도, 파렴치범도 아닙니다. 폭행치사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형은 너무한 것 아닙니까. 설사 경찰 주장대로 내가 토막을 냈다 해도 사체손괴죄가 더 붙을 따름인데 사형은 억울합니다. 내 자식들에 게 아버지는 살인마가 아니란 사실을 꼭 전해주십시오."
이씨도 유언을 길게 했는데, 도중에 "물 한모금만 달라"고 했다. 집행관이 물심부름을 보냈는데, 이씨도 유언에 열중하고 집행관도 분위기에 압도당했는지 물에 대해선 잊어버린 채 진행됐다고 한다. 이팔국씨처럼 끈질기게 사형을 면하려고 애쓴 사람도 드물 것이라고 한다.
이씨는 군납업으로 돈도 모은 사람이었다. 사건 나기 6년 전에 아내가 네 자녀를 두고 죽은 뒤 이씨는 1973년에 내연의 처와 동거하게 됐다. 1975년 6월 26일 이씨는 동대문경찰서에 구속됐는데, 내연의 처를 죽이고 사체를 토막내 버린 혐의였다. '천례없는 극흉 살인극'이니 '일본 바라바라 사건보다 더 충격적이란 표제로 보도된 사건이었다. 이씨는 법정에서 보도와는 다른 설명을 했다.
"처가 이혼을 하자고 해서 다투다가 혼내주려고 머리채를 잡아당겨 쓰러뜨렸는데, 아내는 머리를 다치고 기절했다. 나는 아내 입에 물을 뿜어 넣어 주면서 살리려고 했으나 되지 않고, 그 충격으로 나도 깜박 정신을 잃었다. 얼마 뒤 정신이 들어서 보니 아내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동대문경찰서의 아는 형사를 찾아가 자수한 것이다. 무술에 능한 내가 죽일 마음만 먹었다면 왜 집안에서 그랬겠는가."
이씨는 자신이 6·25때의 부상으로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입원한 병력이 있음을 들어 정신감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씨는 자신의 자수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테이프(경찰관과 이씨의 대화 가 수록된)의 제출을 요청했으나, 경찰에선 그 테이프를 잃어버렸다고 했다고 한다. 이씨는 토막 내는 데 사용했다는 칼, 톱, 그리고 피살자의 뼈 등, 검찰이 제시한 증거물의 감정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씨는 현장검증 사진에서, 아내를 살리려고 자신의 입으로 기절한 아내의 입에 물을 뿜어 넣는 장면이 '목을 조르는 장면'으로 조작돼 있다고 항변했다. 사형이 확정되자 이씨는 재심청구를 하면서, 현장검증에 입회했던 경찰관과 자기를 고문했다는 경찰관, 그리고 테이프를 잃어버렸다는 경찰관을 고문, 위증, 직무유기 등으로 고소했다. 이렇게 버티던 이씨도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기고는, 장사의 몸이었지만 고분고분히 처형됐다고 한다.
"살인도 천주도 필연이었다"
폭행치사와 살인은 하늘과 땅 차이다. 죽음과 삶의 갈림이다. "살인이 아니었고 폭행치사(또는 상해치사…흉기를 썼을 때)였다"고 주장하고 죽은 사형수는 이씨 외에도 많았다. 이씨와 가장 비슷한 사례로는 '춘천호 토막살해 사건'이 있다.
1965년 5월 27일 춘천경찰서는 목수 임동원씨 (당시 45세)를 살인 및 사체손괴 등 혐의로 구속했다. 임씨는 넉 달 전 처가 출타중일 때 그의 집으로 찾아와 하룻밤 재워 줄 것을 간청한 이모 여인(당시 32세)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자다가 통정을 요구했다. 이 여인이 몸을 피해 부엌으로 들어가 칼을 들고 나와 대들었다. 장사인 임씨는 칼을 빼앗았다. 임씨는 경찰에 신고할까 두려워 "딴 데서 자게 해주마"고 꾀어내 얼어붙은 춘천호반에서 목을 졸라 죽이고 허리에 차고 간 낫으로 목, 코, 귀, 음부를 도려낸 뒤 시체를 돌에 매달아 얼음을 깨고 물속에 집어넣었다. 이것이 경찰에서 발표하고, 법원이 인정하여 임씨에게 사형을 선고한 범행내용이었다.
임씨는 확정판결 뒤에도 재심을 포기한 채 집행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임씨는 수사과정에서도 자포자기적인 답변만 하여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있었다고 한다. 서울구치소 교무과 직원인 고중렬씨가 임씨를 것은 만난 것은 대법원에서 상고기각 판결이 떨어지기 전이었다. 임씨는 "지난날 군에서 너무 살생을 많이 했고, 믿음이 없어 이같은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고 하면서 "이제 모든 것을 천주님께 맡기니까 마음이 편합니다"고 했다. 임씨의 이야기를 다 들은 고씨는 괴기하고 병적인 이 범행의 바탕에 있는 임씨의 황폐한 인간성을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임씨의 일생은 피비린내 속을 헤쳐 온 삶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에 지원 입대한 그는 필리핀 정글 속에서 3년 동안 처참한 전투에 종사했다. 오장(伍長)계급을 달고서 미군 포로가 됐다가 1946년에 귀국했다. 미군 정보부대에 지원 입대, 대북 공작대원으로 활동하다가 한국군의 대북 특수부대로 옮겨가 사선을 수십 번이나 넘나들었다. 지리산공비 토벌, 6·25때는 3사단의 유격대원, 팔 관통상, 북진 때는 공산당 간부들을 색출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고, 수색중대원으로 설악산 일대의 동부 산악 전선에서 처절한 전투에 참여했다.
나중엔 체력도 탈진하고 정신도 이상해져 병원으로 후송됐다가 의병 제대했다. 윤무선 변호사가 "그동안 사람을 얼마나 죽였느냐"고 물었더니, 임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죽였지요. 그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와졌습니다. 술을 마시면 더 예민해져 사고를 자주 내고, 이웃에서도 나를 두려워했었습니다"고 했다. 고씨는 그런 임씨가 끔찍한 죄를 짓고, 비로소 천주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란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임씨는 상고기각이 된 뒤 10여 년 전에 헤어졌던 동생을 면회실에서 만나게 됐다. 동생을 만나고 나서 이씨는 일단 포기했던 재심청구를 하게 됐다. 그는 이 여인을 죽인 것은 폭행치사라고 주장했다. 즉 이 여인이 강간을 피해 칼을 들고 대들 때 칼을 빼앗고 넘어뜨린 뒤 짓밟은 것이었다고 했다. 이 여인을 호반으로 유인하지도 않았고, 방안에서 이미 죽었으므로 가마니에 시체를 넣어 호반으로 운반했었다고 임씨는 주장했다. 임씨의 주장대로라면 계획적인 살인이 아니므로 사형은 면하게 되는데, 물론 이 재심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임씨는 처형되었다.
사형과 무기는 삶과 죽음의 차이
…방세 미불금 7천 환의 채무 변제 독촉을 받고 피해자를 항고인(본인)이 사용하고 있는 방에 모시고 실매(實妹)가 준비해다 준 술을 대접하면서 사정을 구하였으나 계속 독촉하게 되어 항고인은 오바를 전당해서 급한 5천 환을 내놓고 조금 연기해 주기를 사정해도 완불을 고집하고 욕설을 하면서 항고인의 넥타이를 움켜쥐게 되어 이성을 잃은 순간…4회의 수권(手拳)으로 대항하여 영감이 쓰러져…
방을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 보니 절명해 있는 것을 알고 바로 뛰어나와 실매에게 사실을 말하니, 오빠! 신고해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 말에, 항고인은 우선 처벌에 대한 공포심에서 주저, 당황하여 신고를 못하게 되었습니다…실매가 수도가에서 물까지 먹으면서 신문 당하는 신음소리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마음대로 쓰시오, 네, 네, 대답했을 뿐이며…목봉(木奉)은 절대로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박상도씨 (당시 39세)가 1971년 대법원에 낸 재심청구 기각에 대한 재항고 이유서의 일부다. 박씨는 방세를 안 내려고 집주인을 나무방망이로 때려 죽이고, 시체를 버렸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 박씨는 우발적인, 또 격정적인 폭행치사란 변명이었다. 이 재항고도 기각됐고, 박씨는 수감된 지 12년 뒤에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됐다. 실제로 박씨는 사형+12년 징역형을 산 셈이다.
살인이라도 강도살인이나 계획살인이 아닌 경우엔 대체로 사형이 선고되지 않는다. 살인이나 강도살인이 아니고 폭행치사, 또는 상해치사라고 주장하는 사형수들에 대해 일반인들 중에는 "그게 다 오십보 백보지 않느냐. 다 죽일 놈들이지" 하고 무시해 버리려는 심리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심리는 "무기나 사형이 뭐가 다른가" "무기를 받으면 차라리 자살하지"라는 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단순화의 논리는 그 바탕에 생명이나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 깔려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는데, 특히 사형 집행이나 사형수 교화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그런 비판을 많이 하고 있다. 예컨대 이런 항변이다.
"폭행치사와 살인은 무기와 사형의 차이입니다. 무기와 사형은 하늘과 땅의 차이, 삶과 죽음의 차이입니다. 오죽하면 사형수들은 거꾸로 매달려서라도 평생을 살아가라면 살겠다고 하겠습니까. 사형폐지를 마치 흉악범을 놓아주자는 운동쯤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고 깜짝깜짝 놀라는데요, 사형폐지는 사형 받을 사람을 무기나 종신형에 처하자는 것 아닙니까. 무기나 종신형이 어디 가벼운 벌입니까."
사형수가 무기로 감형됐을 때 기뻐 날뛰던 이야기는 교도소마다 많이 전해온다. 그 자신이 처형 직전에 감형되어 생명을 건진 적이 있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처형당하기 직전에 생각한다. 설혹, 겨우 서 있을 만한 여지밖에 없는 좁은 바위, 영원히 가시지 않을 암흑과 고독, 그리고 폭풍의 대해(大海)에 둘러싸인 그러한 바위에 선 채로 수 천년, 아니 영원한 세월 속에 파묻혀 산다 해도, 그렇게라도 사는 것이 지금 바로 죽는 것보다 낫다. 오직 사는 것, 살아나가고 살아내는 것, 그것이 어떤 인생인들 상관없다."
집행장에서
; 사형수 오휘웅의 최후
그 며칠 뒤 오씨는 근 넉 달 만에 사형수 교회에 다시 나타나 김 집사의 설교를 들었다. 오씨는 9월8일에 김 집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이제부터 새로운 각오로써 더욱 분투 노력하고자 합니다. 많은 지도편달을 바라옵고 지난날 저의 잘못된 생각을 잊어주시고, 저 또한 교만한 자세와 마음을 다 없애버리고, 늘 주 안에서 생활하고자 합니다. 제가 막상 이런 말을 하고 보니 어딘가 남자답지 못한 생각이 드는군요. 용서하세요. 자매님께 펜을 들고 보니 할말이 없군요. 너무나 속을 썩혀드렸기 때문에…. 아무쪼록 집사님 가정에 항상 주님의 축복이 충만되기를 바라옵고, 건강하시길 빌면서 이만 두서없는 글을 줄입니다. 안녕.
이것은 마지막 작별 인사가 돼버렸다.
1979년 9월 13일, 드디어 그날이 오휘웅씨에게 찾아왔다. 오씨가 연출조에 이끌려 구치감을 나섰을 때, 그를 맞은 당시 교무계장 황정남씨에 따르면, 오씨는 당황하지 않고 중심을 딱 잡고 있더란 것이다. 사형장까지 난 길 양쪽에 서 있는 낯익은 구치소 직원들을 보고는 "감사합니다" "나 먼저 갑니다"고 일일이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오씨가 '아주 양순하게 가줄' 것이라고 믿고 안도했었다고 한다. 사형수가 구치감을 나설 때의 태도를 보면 그가 어떻게 죽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 오씨는 강도살인범 전광국씨 등 일곱 명의 사형수 가운데 세번째로 집행장에 끌려 왔다. 앞의 두 사람이 처형될 동안, 오씨는 감방에서 불안 속에서 기도를 올리면서 "혹시 내 차례가 아닌가" 가슴을 두근거리며 기다렸을 것이다. 오씨가 사형집행장 마루 위 돗자리에 앉혀진 것은 오전 11시 반쯤이었다. 인정신문 뒤 집행관이 "법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라 지금 이 자리에서 사형을 집행합니다. 유언이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하자 오씨는 모든 사형수가 그러듯 잠시 멈칫했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사형에 대비해온 사람도 유언을 하라고 할 때 죽음을 더욱 실감하게 되고, 집행의 순서를 모르고 형장에 나오기 때문에 갑자기 할말이 떠오르지 않아 으레 멈칫한다고 한다. 오씨도 입에서 침이 마른 듯 머뭇머뭇하다가 어렵게 입을 멨다. 처음 몇 마디는 떨렸으나 곧 당당하게 큰 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꿇어앉아 합장기도 하는 자세였다.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도 아십니다"
"하느님, 천당 가게 해주십시오. 저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느님도 알고 계십니다. 저의 유언을 가족에게 꼭 전하여 제가 죽은 뒤에라도 이 원한을 풀어주도록 해주십시오. 여기·검사·판사도 나와 있지만 (필자주 : 판사는 집행장에 안 나옴) 정신 바짝 차려서 저와 같이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도록 해주십시오. 이런 엉터리 재판 집어치십시오! 저는 기독교인으로 죽습니다."
대강 이런 취지의 말 끝에 오씨는 저주를 남겼다. "죽어 원혼이 되어서라도 위증한 사람들과 고문수사한 사람들과 오판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가슴 서늘한 이야기였다. 오씨가 이 저주를 할 때는 자제력을 잃은 듯 흥분했었다고 한다. 형장에 있었던 사람들 중엔 소름이 끼치더라고 실토한 이도 있었다.
오씨는 그뒤의 집례에 양순하게 응했고, 집행에도 의연하게 따라주어, 사형집행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빌면 "편안하게 잘 갔다"고 한다. 오씨가 밧줄에 매달려 있는 동안 집행 참여자들은 건물 바깥느티나무 밑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했다. 서울구치소 보안과장이 참여 검사에게 물었다.
"영감님, 오판 아닙니까?" 검사는 교무계장에게
"억울하다고 죽는 사형수가 많습니까?" 하고 물었다.
계장은 "아니오. 나로선 처음입니다"고 했다.
보안과장이 "상담할 때도 그랬어?" 하고 다시 물었다.
계장은 "그걸 모르셨어요? 오휘웅이는 안죽인 것 같아요"라고 했다.
검사는 이때 말없이 땅만 내려다보더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 그의 시체는 관에 넣어져 가족에게 인도됐다. 가족들은 일련 정종 신도들과 함께 장의차를 갖고 와서 시체를 인수했다. 아버지 오기남 씨에 따르면 관을 열어 시체를 확인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구치소 직원들에 따르면 오기남씨는 "왜 죄 없는 내 아들 죽였어 !"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김 집사는 오씨의 유언요지를 집례목사 김준영씨로부터 들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가족들은 오씨의 시체를 벽제 화장장으로 싣고 가서 태운 다음, 재는 부근 야산에 뿌렸다.
기독교인으로 죽었다는 오씨는 일련정종의 장례의식에 따라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때 나이 만 34세였다. 그는 구속된 지 4년 9개월 만에, 사형이 확정된 지 3년 7개월 만에 처형됐다. 그의 어머니 이남수씨는 아들의 일로 화병을 얻어 앓다가 아들이 간 지 3년 3개월 뒤 세상을 떴다고 한다. 오기남씨는 죽은 뒤에라도 억울함을 밝혀달라는 아들의 유언을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p.s. 긴글의 압박이지만 혹 도움이 될까 올립니다.
윗 글은 조갑제의 '사형수 오휘웅이야기'의 1장에 들어있는 내용들이었던 것 같은데..
저작권 시비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86년도에 나온 책으로 지금은 사보기도 어려울 것 입니다.
혹시 문제된다면 삭제해주시길 바랍니다.
사형수 오휘웅은 대한민국에서 흔치않는 억울한 사형으로 회자되는 인물인것 같습니다. 사건내용은 두씨여인 이라는 유부녀와 내연관계였던 오위웅씨가 다른 처녀와 혼담이 오가자, 두씨여인이 일가족을 수면제를 먹인뒤에 교살하였다는 것이고, 검찰은 오씨는 수면제를 먹이고 오휘웅씨가 교살한 것으로 기소, 1심재판중에 두씨여인이 자살하고 결국 살인죄 확정판결끝에 사형집행된 케이스 입니다.
누구도 끊을 수 없는 날개를 달고
…오늘은 제가 동화 한 편을 소개해 드릴께요. 가오리연 하나가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가고 있었대요 싱그러운 바람을 타고 말예요. 저 밑으로 강이 보이고 골은 산이 멀어져 보이고, 빌딩이 보이고, 세상 모든 것이 다 보였대요. 가오리연은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기분이 우쭐해졌대요. 자기보다 높은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무언가 뒤에서 잡아당긴 거죠. 바로 실이 다 되었기 때문이었어요.
가오리연은 퍽이나 안타까와 몸부림을 쳤대요. 그런데 지나가던 바람이 울상을 하고 있는 가오리연을 보고, 넌 왜 높은 곳으로 가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대요. 가오리연은 실 때문이라고 불평을 늘어놓았어요. 그러자 바람이 싱긋 웃으며, 그래, 그러면 내가 그 실을 끊어줄까, 하고 은근히 물었지요. 가오리연은 너무 기뻐서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바람은 품에서 칼을 꺼내 칼바람을 일으켜 실을 툭 하고 끊어버렸어요. 그때, 실만 없으면 아주 높은 곳으로 한없이 올라가리라 생각했던 가오리연은 아래로 아래로 슬픈 몸짓을 하며 힘없이 떨어지고 있었답니다.
…전 이 글을 읽으면서 마치. 저를 두고 써 놓은 것 같아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내가 여태 살아온 모든 환경이 지극히 최선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좁디 좁은 소견으로 얼마나 나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길을 부담스러워하고 저주하고, 벗어나고 싶어했는지 모릅니다. 상황만 바뀌면 금방이라도 무언가 해낼 것만 같고…
이제 내가 스스로 그분의 손길을 뿌리침으로써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지만, 낙하하는 짜릿한 쾌감은 찾지 않으렵니다. 떨어 지는 지금 아무 곳이나 몸을 맡겨 바람에 쓸려 버리면 곁국 진창에 빠져 버린게 될 테니까요. 떨어지는 지금 내 실타래를 갖고 계신 주님을 향해 바람을 거슬러 간다면 그땐 떨어지는 내 몸을 주님이 받아주시고 이전과 같은 실이 아니라 그 누구도 영원히 끊어버릴 수 없는 날개를 달아주시겠지요(하략).
<1985년 10월 31일에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최윤성씨가 1984년 12월 15일에 김완선 집사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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