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사형장- 현 서대문형무소 기념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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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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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주로 봄(3,4월)과 12월 하순 두 차례 집행이 치러졌다. 80년대에는 9월이나 10월말에 집행이 있기도 했다. 1982, 83년에는 한여름 복중에 집행이 있었다. 형장에 24시간 보존키로 돼 있는 시체가 썩어 그 냄새가 진동했다. 전국에서 가장 사형집행 건수가 딴은 서울구치소의 경우엔 한 번에 5∼7 명씩 교수하는 게 보통이다.
최근엔 정부통계에서 사형집행자수가 나타나지 않는데, 매년 20명 안팎인 것으로 추정된다.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피고인수는 1980년에 32, 81년 33, 82년 35, 83년 19, 84년 18명이었다. 70년대 이후 사형이 집행된 적이 없는 달은 1,2월이다. 이때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처럼 사는 사형수들도 약간 안도할 수가 있다. 사형집행이 있음직한 4월이나 12월 하순에는 사형수들이 바싹 말라간다. 서울구치소에서 오래 근무했던 어느 교정공무원은 이렇게 말한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집니다. 가족에게 연락을 해 달라는 부탁이 잦아지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않고, 재소자와 자주 다투는가 하면, 교화업무에 협조를 하지 않고, 투정을 부리기 일쑤지요. 그 시기가 지나가면 다시 조용해집니다. 반대로 경축일이 가까와 오면 혹시 감형이나 되지 않을까 숨을 죽여 기다리지요."
법무부장관의 사인이 없으면 사형수는 기한 없이 연명을 할 수가 있다. 60년대엔 10년 이상 그렇게 살고 있는 사형수도 있었으나 70년대에 들어 와서는 확정 뒤 7년 정도 연명한 것이 최장 기록이었다고 한다(서울구치소의 경우). 박철웅, 김대두씨 등 진범임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형수일 경우엔 확정된 지 1, 2년 안에 집행해버리기도 한다.
억울하다고 재심을 청구하는 사형수에겐 그것이 최종적으로 기각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재심 개시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즉 재심청구 사실만으로는 사형이 연기되지 않는다. 끈질기게 재심을 청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러는 사형수도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은 확정된 이후에도 3∼5년쯤 더 살다가 가기도 한다. 1984년말 현재 서울구치소에는 24명의 사형 확정수와 14명의 미확정 사형수가 있었다. 전국 수자는 1백 명을 육박할 것으로 보인다. 1983년 7월 윤상군 유거범 주영형씨 등이 처형된 이후엔 줄곧 집행이 없었다. 법무부장관이 바뀐 지 석 달이 지난 1985년 10월 31일에 전국적으로 집행이 있었다.
'집행에 차출' 면하려고 발버둥쳐
사형집행의 결정은 교도소와 관계없이 이루어지므로 교도소에선 짐작만 할 뿐이다. 그 짐작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대검찰청에서 사형수 대여섯 명을 지정, 사진촬영과 건강진단을 해 올리라는 지시가 떨어질 때다. 교도소나 구치소에선 여러 사형확정수 가운데 그 몇 사람만 불러내면 그들이 눈치를 채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여 모든 사형수에 대해 촬영과 건강진단을 해버린다. 그때부터 사형수들은 전전긍긍해 한다.
사형집행 지휘서가 구치소장 앞으로 전달(인편)되는 것은 보통 그 건강 진단이 있고 나서 석 달쯤 지난 때다. 건강진단의 대상이 된 사형수가 거의 그대로 사형집행자 명단에 올려진다. 집행지휘서는 하루 전에 전달된다. 서울구치소의 경우, 집행의 준비는 대충 이렇게 한다.
먼저 소장이 보안간부와 교무간부를 불러 집행계획을 의논한다. 집행을 주관하는 쪽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조용한 집행'이다. 사형수가 감방에서 끌려 나올 때 소동이 벌어지지 않도록 계획을 짠다. '참회 속에서 양순하게 가주는'것이 교도소측이 바라는 바다. 집행순서가 문제다. 특히 첫 사형수가 어떤 태도로 죽느냐 하는 것이 그 날의 형장 분위기를 좌우한다. 소장은 으례 구치감의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사방(舍房)에 있는 사형수부터 차례로 집행하자고 한다. 그래야 먼 감방에는 사형집행 소식이 늦게 알려져, 뒤에 집행되는 사형수의 동요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사형수 교화를 맡고 있는 교무간부는 "신앙심이 깊고 얌전한 사형수를 가장 먼저, 그리고 눈·콩팥 등 신체 기증자를 맨 끝으로 돌려야 분위기도 잡을 수 있고, 이식수술의 절차도 순조롭게 진행된다"면서, 다른 집행순서를 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출입구에서 가까운 사형수부터'란 관례가 채택된다.
이어서 사형집행에 종사할 인원을 뽑아낸다. 스무 명쯤이 필요한 '사형집행인'으로 자원하는 이는 있을 턱이 없고, 거개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빠지려고 한다. 신경쇠약 증세가 있다, 곧 결혼할 때인데…, 아내가 임신중이다 등등의 사유가 등장한다. 딱 부러지게 "차라리 사표를 내겠다"고 선언해 버리는 이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순번을 정해놓고 공평하게 사형집행의 기회를 배당하곤 한다.
인원편성이 끝나면 교무계에서는 집례를 맡을 신부, 목사, 스님에게 "내일 급한 일이 있으니 아침 일찍 나와달라"고 연락을 취한다. 평소에도 교도소에 파견돼 있다시피 하는 이들 성직자들은 단번에 그 말의 뜻을 알아차린다. 교무계에선 집행될 예정인 사형수들을 맡아 1주일에 한 번씩 '사형수 교회'까지 와서 예배를 올려주는 여신도들에게도 "내일 교무계로 나와달라" 고 연락을 한다. 사형수 유족에겐 집행 뒤에 알린다. 집행 당일 새벽엔 사형장 청소가 있다. 재소자들이 하는데 이 소문이 퍼지면 감방은 술렁인다. 구내공장에서 전날 저녁에 돗자리, 그리고 용수를 만들었다는 소문도 금새 퍼진다.
"밧줄이 꺼끄럽습니까"
사형수들이 자신의 집행을 예감하는 것 같다는 증언은 많다. 지난해 10월 31일에 처형된 강도강간범 최윤성씨 (26)는 아주 감수성이 뛰어난 청년이었다. 최씨를 맡았던 김모 집사에 따르면 죽기 직전엔 죽음에 대한 이야기, 공범 황모씨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 등을 많이 했고, 몸 단장을 하지 않았으며, 3일 전부터는 운동장에 운동하러 나오지도 않았고, 계 속 틀어박혀 책만 보았으며, 전날 가족이 면회 갔을 땐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는 것이다.
최씨는 그보다 1년 전인 1984년 11월 1일에 김모 권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 오후 문 목사님을 뵈러 교회실에 들어서면서 저는 죽음을 봤습니다. 앉아 묵상하는 동안 제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죽음의 차가움에 온몸을 떨었습니다. 내일의 집행을 위한 마지막 예배라고 생각했거든요. 내일 아침이 되면 지금 허둥대는 제 모습에 심한 부끄러움과 어처구니없음을 느끼게 되겠지요. 평소 죽음과 삶을 초월했느니, 두렵지 않다느니 하고 떠벌인 제가 한순간 그 그림자만을 보고도 혼비백산하는 걸 보니… 제 자신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낍니다."
이 청년에게 그 죽음은 꼭 1년 뒤에 찾아왔지만, 1984년 11월 1일 그 날 최씨는 내일이면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심경에서 서둘러 이 편지를 썼던 것 같다. 최씨는 그 엽서 편지에다가 이현주 목사의 이런 글을 인용, 자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다.
"…하늘은 어찌하여 저토록 푸르며 때를 맞춰 햇빛과 비를 내리시는가. 어찌하여 냇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우거진 수풀에서 새들은 지저귀는가. 그대들의 눈에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나의 눈에는 그대로 슬픔이었다…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것은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한다는 거다. 이미 죽음일 따름인 나의 몸뚱이에 어찌하여 아직도 움직일 수 있는 힘과 먹고 싶은 마음과 어처구니없는 욕심이 남아 있단 말인가. 지금이 창세 이전이 울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울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죽으면 다시 고요한 어둠 속에 묻히게 될까. 모든 것이 있기 전의 그 정적으로 다시 들어가게 될까. 나의 마음은 죽음을 그리워하는데 나의 문드러진 몸뚱이는 그토록 목마르게 삶을 갈구하고 있으니…"
10·26사건 때 김재규씨와 함께 처형된 유성옥씨 (전중앙정보부 운전사)는 처형되기 바로 전날 느닷없이 서울구치소 어느 직원에게 물었다고 한다.
"목에 밧줄이 걸리면 꺼끄럽습니까."
"그런 생각 마세요."
"꿈에서 자꾸 그런 장면이 나타납니다."
"마닐라 삼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꺼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편안히 갑니다."
'넥타이 공장'의 모습
서울구치소의 사형집행 개시 시간은 오전 10시이다. 1970년대 이래의 관습이다. 이 관습이 두 번 깨졌다. 문세광씨와 김재규씨는 이른 아침에 처형됐다. 김씨의 하수인인 박선호씨 등 네 명은 오전 10시부터 처형됐고. 사형집행 날, 아무리 보안을 해도, 이날 아침에는 재소자들이 낌새를 채게 된다. 기상 나팔 직후에 나오던 방송이 안 나오고, 야외 사역이나 아침 운동이 없고, 통로의 출입이 봉쇄되기 때문이다. 삼엄한 분위기에 짓눌려 구치소는 쥐죽은 듯 고요해진다.
형법 66조는 사형은 교도소 안에서 교수형으로 하고, 군형법은 지정된 장소에서 총살로 집행하도록 정해 놓았다. 사형이 교수형과 총살형으로 정해진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다. 법에 명시된 것은 1905년 형법대전 제 94조가 "사형은 교(絞)로 한다"고 못박은 것이 처음이다. 세계적으로 교수형이 가장 널리 채택되고 있는 사형 방법이다. 미국에서 주로 쓰는 '가스 중독살'과 함께 고통이 덜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교수대가 있는 서울구치소 사형집행장의 모습은 대강 이렇다. 사형수는 행형법 제 13조에 따라 구치소나 미결수용실에 수감된다. 그들이 미결방에 들어 있는 것은, 사형수는 형사소송법상으로는 기결수이지만 행형정책상으로는 집행과 동시에만 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미결수다.
서울구치소의 미결 구치감은 4천 평 가량 되는 대지 위에 서 있는 흰 벽돌 2층집이다. 여기에 6개의 사(舍)가 있고, 사는 상하층으로 돼 있다. 이 구치감치 벽은 높다. 그 북쪽 벽에 철문이 하나 있다. 이 철문을 나서면 무학재 너머 금계산이 보인다. 철문에서 북쪽, 즉 금계산 쪽으로 맨땅에 길이 나 있다. 재소자들이 자주 불려가는 운동장이나 의무실로 이어지는 길이다. 그런데 한 30걸음쯤 걷다가 보면 왼쪽으로 꺾어지는 샛길이 나온다.
이 샛길을 옛날 재소자들은 '지옥3정목'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일제시대부터의 별명인 듯하다. 사형수들이 지옥으로 가는, 번잡한 교통신호를 기다리는 곳이란 뜻이라 한다. 이 샛길을 따라 열 걸음쯤 더 걸으면 왼편에 높이 3.5미터쯤 되는 흰 담 벽이 나온다. 담벽에 붙은 철문을 들어서면 잡초 투성이의 모래 땅바닥에 서 있는 15평 가량의 직사각형 목제 기와 건물과 만나게 된다. 높고 흰 담 벽이 직사각형 (15×10m)으로 이 하얀 건물을 에워싸고 있어 바깥에선 건 물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이 처형장이다.
"집행 날짜를 알려주었으면…"
사형수를 형장까지 데리고 오는 것을 연출(連出)이라고 한다. 연출조는 무술에 능한, 건장한 보안과 직원 3명으로 구성된다. '지옥의 사자'격인 이들이 어느 날 오전 갑자기 감장 정문 앞에 나타난다. 덜컹, 문을 열고는 "19xx번 의무과로 체중검사! 빨리 나와!"라고 소리치거나 "전방(轉房)!" 이라고 외친다. "형장으로 갑시다"고 정직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사형수들에게 사형날짜를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옛날엔 사형집행장으로 들어가는 '지옥 3정목'의 샛길에 이를 때까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예외가 있기는 하다. 1982편 여름에 처형된 금당사건 주범 박철웅씨는 교도소 직원들에게 그 전부터 집행장의 구조나 분위기를 캐묻곤 했다. "한번도 못본 곳이라서 그럽니다. 미리 생각해 두면 그날엔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씨는 "집행예정일도 귀뜸해 달라"고 했다.
"몸도 깨끗이 하고, 책도 정리하고, 같은 방 형제들과 작별 예배라도 보고 가야지요."
예정일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집행일 오전 그를 데리러 간 연출조는 "오늘은 하느님 앞으로 가는 날이다"고 참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박씨의 수갑도 풀어주었다(사형수는 1심에서 사형구형이 떨어지면 집행 때까지 수갑을 차야 한다). 이것도 '특혜'였다. 박씨는 태연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고 성경, 찬송가 등 자기 물건을 정리한 뒤 감방 동료들과 작별 예배를 보고 형장으로 향했었다.
일본 오사까 구치소에선 집행 이틀 전에 이 사실을 사형수에게 알려주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 이 기간에 사형수는 가족과 마지막으로 만나 구치소 안에서 식사를 함께 할 수도 있다. 사형수들은 신변을 정리한 뒤 집행 직전엔 설사촉진제를 복용, 뱃속까지 비우고, 가쁜한 기분으로 형장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고중렬씨(64·화양천주교회 사무장)는 서울구치소에서 1954∼72년까지 18년간 근무하면서 사형수 교화에 종사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사형수를 가장 많이 상대했고 사형집행 현장에도 가장 많이 참여했으며 약 4백 명의 사형수를 대자(代子)로 만든 사람이다. 그는 심지가 굳은 사형수에겐 집행 당일 아침 일찍 감방으로 찾아가 "오늘 천국으로 갈 것 같으니 끝까지 자세를 흐트리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거개가 담담하게 그 소식을 받아들였고 형장에서도 그랬다는 것이다. 고씨는 이런 소감을 책에 쓴 적이 있다.
최소한 형 집행 1, 2개월 전에 성직자(교도소 담당)에게 집행일자를 알려 떠날 준비라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떨까. 비록 죽어야 할 인생이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얼굴 붉힘도 없이 완전한 죽음으로써 평안히 떠날 수 있도록 조그만 시간을 주고 후회 없이 (형장의) 쪽대문을 스스로 열고 들어갈 수 있게끔 준비시켜 주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닐까. (『서울구치소』)
여섯 번 죽는 사형수
연출조가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눈치를 챈 사형수들 중에는 허무한 반항을 하는 이도 있다. 변소로 숨어들고, 발버둥치고… 연출조의 속임수에 걸려 정말 의무과로 불려가는 줄 알고 나온 사형수라도 구치감 담벽의 철문을 지나, 곧장 뻗은 통로에 들어서면 섬뜩한 느낌을 갖게 된다. 길 양쪽에는 거의 1미터 간격으로 교도소 직원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무슨 비상인가."
"의무과에선 왜 부를까."
"혹시?"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꽉 막힌 채 걷다가 보면 어느새 지옥 3정목. 옆에 따라오던 교도관이 사형수의 몸을 왼쪽으로 툭 치거나 턱으로 샛길을 가리킨다.
"이쪽으로."
그 순간 사형수는 멈칫하고 교도관을 쳐다본다. 눈은 이미 초점을 잃고 있다.
그런 시선으로 멀리 인왕산을 보고, 몇 날을 두고 훔쳐 봤던 하늘을 보고, 자신이 거처했던 감방쪽을 뒤돌아보고…. 어느 사형수는 형장 문앞까지 왔다가 그만 온 길로 줄달음,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다가 감방 앞까지 와서는 "어머니, 어머니"하고 목놓아 엉엉 울다가 다시 형장으로 끌려 가더라는 것이 고중렬씨가 기억하는 5, 60년대의 단상들이다.
요사이는 달라졌다. 사형수는 연출조가 데리러 왔을 때 대충 눈치를 채고 늦어도 구치감 철문을 나서는 순간, 삼엄한 분위기로 해서 그는 '오늘의 운명'을 알게 돼 있다. '지옥 3정목'샛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교무계장 과 '담당'(그 사형수의 종교에 따라 담당직원이 정해져 있다)이 뛰어오듯 다가와 사형수 양쪽에서 바짝 붙어 손을 잡으면서 간곡하게 말한다.
그 당부는 대체로 일정하다. 기독교신자에겐 "하느님께 영광 돌리자", 불교신자에겐 "극락에 가도록 하자", 신체 기증을 약속한 사형수에겐 "유언 때 그 이야기를 꼭 해달라." 사형수의 손은 예외없이 땀에 젖어 축축하다고 한다. 이때 사형수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지만 아무리 신앙이 깊고 담이 큰 사람이라도 약간의 동요는 있게 마련이다. 심한 경우엔 하체에서 힘이 빠져 달아난 듯 주저 앉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소가 도살장에 끌려들어갈 때 그렇게 하듯 뒤로 뻗대기도 한다. 그러면 연출조가 양쪽에 끼고, 들 듯하여 끌고 간다.
"먼저 갑니다"
"그동안 신세졌습니다"고 인사하는 사형수도 있다. 박철웅씨가 그랬고, 1979년 9월에 처형된 오휘웅씨가 그랬고. 어느 사형수는 몇년 전 백지장같이 하얘진 얼굴에, 흰자위만 남은 눈을 번득이며 "xx들, 날 왜 죽여!"라고 절규했다. 교무계장과 담당이 사형수의 양쪽에 서고, 바로 뒤에 세 연출조 직원이 부축하듯 뒤따르면서 일행은 샛길로 꺾어들어 왼편 담벽의 철제 쪽문을 열고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재소자들이 '넥타이 공장'또는 '고만통'이라고 부르는 집행장 건물이 스산하게 거기 서 있다.
이 건물이 시야를 확 메울 때 사형수는 다섯번째로 죽는다고 한다. 1심 선고 때, 2심 때, 3심 확정 판결 때 죽고, 지옥 3정목에서 꼬부라 질 때 네번째 죽고, 이 건물을 봤을 때 다섯번째 죽고, 교수대에서 여섯번째로 마지막 죽음을 맞는다는 얘기다. 그러나 어디 여섯 번뿐이겠는가.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감방문이 열릴 때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 다, 방송이 갑자기 안 나올 때마다, 비상이 걸릴 때마다, 아침 운동이 중단될 때마다, 옆방의 사형수가 사라질 때마다 날마다, 시간마다, 분마다 죽어가는 것이 사형수의 삶이다.
집행장 돗자리 위에 앉다
높은 흰 담벽에 둘러싸인 집행장 건물에는 양쪽 측면에 둘, 북쪽에 하나, 모두 세 개의 쪽문이 나 있다. 북쪽 담벽문과 가장 가까운 북쪽문은 사형집행을 주관하는 검사, 구치소장 등이 드나든다. 사형수는 북쪽 담벽문을 지나 이 건물을 왼쪽으로 돌아서 동쪽 측면에 난 쪽문을 통해 형장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형수는 우선 고요함에 압도된다. 벽면을 따라 스무 명쯤 되는 사람이 꽉 서 있는데도 형장 안은 침묵, 바로 그것이다.
남쪽 구석의 병실에 칸막이처럼 늘어뜨려져 있는 하얀 커튼이 그의 시야를 메우게 된다. 내벽은 흰색 계통이고, 천장에선 백열등이 빛나지만 형장 안의 분위기는 음울하다. 집행장의 마룻바닥은 시커멓게 변색된 그대로다. 새벽에 청소는 했지만 군데군데 보오얀 먼지가 앉아 있다. 사형집행 당일에만 청소를 하니, 흉가 같은 집행장은 누추할 수밖에 없다.
마룻바닥의 앞쪽, 곧 북쪽에는 높이 60센티미터쯤의 강단이 있다. 강단과 마루 사이엔 목책을 닮은 경계목이 박혀 있다. 강단의 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 있고, 그 뒤에 세 사람이 앉는다. 가운데가 구치소장, 그 오른쪽이 검사 자리다. 탁자 위에는 검은 보자기가 덮여 있고, 그 위에는 두툼한 서류뭉치가 놓인다. 그 사형수의 신원기록과 판결문, 재심청구서 등이 묶여 있는 신분장이다.
강단의 뒷쪽 벽면을 따라선 벤치가 두 개 놓여 있다. 여기엔 사법연수원생들이 견학차 와서 앉기도 한다. 구치소장이 앉은 자리 왼편에 작은 탁자를 앞에 두고 명적과 직원이 앉는다. 유언을 적기 위해서다. 그 뒤 의자엔 목사, 신부, 스님 등이 앉는다. 강단 바로 밑, 구치소장 바로 눈 아래 마룻바닥에 돗자리가 깔려 있다. 전날 짠 것이든지, 깨끗한 가마니를 뜯어낸 것이다. 사형수는 이 돗자리 위에 편하게 앉혀진다. 연출 때 그대로 그의 양쪽엔 교무계장(오른쪽)과 담당이 서고 등 뒷편엔 3명의 연출조 직원이 선다. 양쪽 측문에 3명씩 모두 6명의 보안과 직원이 서서 계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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