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법무부 장관의 집행명령이 내려짐에 따라 10월 31일 서울구치소와 광주교도소에서 가정파괴범으로는 첫 번째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상인 (韓相仁29) 황인규(黃仁奎26) 최윤성(崔允成26) 최성훈(崔成勳22)등 4명은 서울구치소에서, 이정수(李正洙31)는 광주교도소에서 각각 모두 5명이 교수형으로 처형되었다.
한상인은 강도 강간, 강도살인죄 등 혐의로 83년 3월11일 서울지방법원남부지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같은 해 5월12일 서울고법에서 항소 기각되었으며, 83년 9월13일 대법원 상고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황인규 최윤성 최성훈등 3명은 특수강도 강간죄로 83년 5월 17일 서울지법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83년8월18일 서울고법에서 항소기각, 같은 해 12월13일에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정수는 특수강도 강간 살인 미수죄로 82년12월14일 광주지법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83년4월28일 광주고법, 83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2명은 무기징역, 나머지 두 명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중 황인규 최윤성 최성훈등 3명은 대법원의 최후 판결이 있는 뒤 84년 4월, 5월 각각 재심청구를 냈으나 모두 기각됐다.
집행된 사람중 한상인 황인규 최윤성 최성훈등 4명은 서울 구치소에서 신장과 안구를 기증키로 했다. 그러나 보통 신장은 이식거부반응이 없는 상대를 찾지 못해 거의 포기하는 상태이다.
이번 범죄자 대부분이 20대 전후의 젊은층에 의해 잔혹하게 저질러졌다.
주부를 남편이 보는 앞에서, 임산부. 어린 여학생을 가족이 보는 앞에서 폭행하고 마구 칼로 찔러 죽이는 등 가장 잔학한 방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한상인은 82년10월 25일 오후7시40분쯤 반상회를 하고 있던 서울 강남구 잠원동 H아파트 한모씨(43,여) 집에 들어가 문간방에 세든 김모양(24) 방에 침입, 과도로 위협한 뒤 금팔지등 34만 원어치를 강탈하고 김양의 가슴을 찔러 살해한 뒤 심부름 갔다가 돌아오는 김양의 여동생(20)을 폭행하는 것 등 82년 9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8차례에 걸쳐 강도 강간을 일삼아 왔다.
최윤성(崔允成 26) 사형집행 1985년 10월 31일
종교: 기독교
자매결연: 김혜원 권사 84년 6월 4일부터 김완선 집사와 자매결연
죔명: 특수강도 강도 강간죄(황인규 최성운과 동일)
1983년12월13일 대법원 사형확정
범행
최윤성은 교도소에서 알게된 황인규등 여섯 청년들과 작당하여 강도 강간을 일삼았다. 수색에서 철도 변을 따라서 무조건 대문 열린 집만 털었다고 한다. 최윤성등은 82년 11월 17일 오후 2시 10분쯤 서울 강서구 화곡본동 金모씨(45,여)집에 복면을 하고 들어가 38만 9천 원 어치의
금품을 빼앗고 김씨의 딸 김 모양(20)등 3명을 폭행했다. 또 그 해 12월 8일 오후 2시 50분쯤 중구 신당동 김 모씨(48 여)집에 침입 김씨의 딸 朴모양(23)을 차례로 폭행하는 등 82년 9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모두18차례 강도 강간을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가 85년 10월 31일 오후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공소사실 가운데는 저지르지 않은 범행도 끼여 있다는 이유를 들어 재심청원하기도 했는데 그 어머니가 전세금을 빼 내서라도 변호사 선임하겠다는 말을 하자 흥분하면서 “그러면 재심을 포기하겠다”고 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1985년 11월 1일 조선일보)
대법원 판결문 요약
「방망이 삽 손도끼 등을 지니고 부녀자와 어린이만 있는 가정집에 침입,
금품을 강탈하고“몸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친정어머니 앞에서 임신 5 개월의 아녀자까지 차례로 욕보인 것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행위로 이사회에서 영원히 격리 시켜야 한다.」고 판결했다.
최윤성의 가정환경
(1986년 6월호 어느 월간잡지에 기고한 조필제/자유기고인 글 참조): 최윤성의 아버지는 일찍이 가정을 버렸고 무당인 어머니는 세 딸과 한 아들을 겨우 굶기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큰누나는 직업여성으로 고달픈 생활을 했다.
비정상적인 혼인으로 아들을 낳아 키울 수 없어 어머니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무당을 그만둔 뒤로는 손자를 업고 다니며 파출부 일을 했다. 그러다가 추락사고로 허리를 다쳐 파출부도 그만 두었다. 작은누나도 직업 여성이 됐다 .어머니는 손자를 큰딸에게 돌려주었고 큰딸은 아들을 거리에 버렸다. 어머니는 어느 중이 주어다 기른 손자를 도로 찾아 왔다. 이런 환경에서 최윤성은 소년기를 보냈다. 중학 2년을 중퇴했다. 야구부원 이었는데 ,코치의 미움을 받은 것이 중퇴의 이유였다고 한다. 소년기에 친척의 가게에 취직하여 여기에서 라디오와 시계를 훔쳤다. 친척의 고발로 소년원에 들어가 나올 때 영원한 동반자 황인규를 알게되어 교수대 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 서울 구치소에 와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최윤성의 최후
최윤성은 신앙심이 그렇게 깊은 것 같지는 않게 보였다.
최윤성은 가족에 대한 정이 아주 깊고 세심했었다고 한다. 가정을 버린 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했고 ,특히 여동생과 고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사형집행은 봄철과 또 연말경에 보통 실시된다. 그래서 이 철에는 사형수들이 바짝 바짝 말라간다.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 집회 출석을 거부하기도 하고 교도관들에게 반항하기도 한다. 사형집행 사흘 전 어느 교도관이“ 몸 아픈데 있니?”라고 물어보자 ,집행이 임박했음을 짐작하고 그때부터 운동장에 아침운동에도 안나오고 감방에 처박혀 책만 읽었다고 한다. 가족이 면회 갔을 때, 최윤성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을 하고서 나타났다고 한다.
최윤성은 자신의 추악한 죄를 인정하면서도 “살인은 하지 않았는데 사형선고는 너무하다.”고 불만이었고 “살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번민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85년 10월31일 오전 11시10 분께 사형장에서 인정 심문을 받았다. 오늘 세 번째로 집행이 되었다. 83년 말 이후서울 구치소에서 사형집행이 한 건도 없었다.
그는 확신을 가진 자세로 교도관들과 여러분들께 먼저 간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차분한 모습으로 유언을 했다. 목사님과 신앙 자매들께 감사와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나는 구치소 소장에게 사형수들이 집행 전에 좀더 자유롭게 자매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건의도 했다.
그는 죄의 용서를 빌며 하나님 은혜로 구원 얻게 된 것을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내가 예배를 인도하고 난 후 교도관들이 용수를 씌울 때도 그는 찬송을 불렀고 가사가 생각나지 않자 “목사님 내 영혼이 ....그 다음은 뭐지요?”라고 했다. 나와 기독교 교도관들은 곁에서 집행될 때까지 계속 찬송을 불렀다. 그의 시신은 벽제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
사형집행후 자식 찾아와 통곡하는 어머니
사형이 집행된 후 구치소 측에서는 그 어머니가 충격을 받을까보아 의논할 일이 있으니 속히 오도록 했다.
서울구치소 내정문밖 내가 가지고 다니는 봉고 차에서 자매들고 기다리다 최윤성의 어머니를 만나서 차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눈치로 짐작을 했겠지만 나는 잠깐 기도하자고 하면서 최윤성의 집행 내용을 말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그 어머니의 원통해 하며 통곡함을 어떻게 막을 길이 없었다. 우리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 어머니를 붙들고 진정 시키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내 아들아 네가 무슨 죄가 있느냐 같이 가자 같이 가자, 부모 잘못 만나 가난한 죄다. 못 가르친 죄, 친구 잘못 만난 죄다. 윤성아 네 어미와 같이 가자 같이 가자”하면서 통곡하고 건물 층계에서 뒹굴어 떨어지는 것을 곁에 있던 사람들이 붙들 기도했다.
이 슬픈 통곡의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다. 한 맺힌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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