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부산 만덕 초등학교 강주영양 살해사건과 무죄선고
03.01.15
처음 발표된 경찰의 발표대로라면 이 사건은 아주 단순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종사촌 언니와 다른 3명의 피고인들이 정말 범인이었는지, 혹은 제3의 범인이 있었는지… 피고인들이 무죄를 주장하면서 사건은 가닥을 잡지 못하고…
10대 소녀가 범죄에 대한 호기심과 유흥비 마련을 위해 친구들과 함께 이종사촌동생을 유괴, 살해한 뒤 몸값을 요구하다 경찰에 붙잡혔던 1994년 10월 13일의 '강주영양 유괴살인사건'
강주영 양의 사체는 사촌언니인 李양(19)의 집 안방 책상 밑에서 보자기로 싸여있다 발견됐다. 사건에 관계되었던 범인은 李양을 비롯 이양의 남자친구 원종성(원철희 당시 시의회부의장 아들)씨와 이양의 고교동창인 남모양, 그리고 김철민씨 등 4명.
부산 해운대에서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이들은 모 커피숍에서 "심심하고 용돈도 궁한데 재미삼아 한건 하자"는 원종성씨의 제안으로 이양의 이종사촌 동생인 주영양을 납치, 몸값을 요구하기로 하고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주영양을 꾀어, 원씨의 승용차로 조흥은행 남포동 지점옆 공터로 끌고 갔다.
이들은 강주영 양의 집에 전화를 해 "현금 2백만원을 부산극장 관람석에 갖다 놓으라"고 협박한 뒤 곧 이어 국제시장 부근 공터로 가서 이양과 남양에게 망을 보게 하고 승용차 안에서 김과 함께 주영양을 목 졸라 살해했다는 것.
이들은 경찰에서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으로 범행을 시작했으나 주영이가 언니 이양의 얼굴을 알기 때문에 탄로가 날 것이 겁나 죽였다"고 말했다.
처음 발표된 경찰의 발표대로라면 이 사건은 아주 단순한 사건이었다. 4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밝히고 형을 구형하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범으로 지목됐던 피고인들의 무죄 주장에 사건은 꼬여가기 시작했다. 이종사촌 언니와 다른 3명의 피고인들이 정말 범인이었는지, 혹은 제3의 범인이 있었는지, 이 첨예한 논란 끝의 1심 재판 결과는 이런 이유로 더 큰 의혹으로 자리잡았다.
1995년 2월 24일 진행된 이 사건의 1심 재판은 3개월에 걸친 13차례의 공판에 종지부를 찍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나 결론은 검찰의 완패로 끝나 버렸다. 재판부는 원종성 피고인 등 3명이 제기한 알리바이(현장부재증명)와 가혹행위 주장을 모두 인정, 이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또한 이종사촌 언니였던 이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함으로써 놀라움은 더 했다. 당시 이 피고인은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죄질의 경중을 떠나 미성년자인 피고인에게 사형까지 구형한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였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었다.
재판장을 맡았던 박태범 부장판사는 부산지법에 재직한 1년 여 동안 반인륜 범죄나 공무원 범죄 등 20여건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해'예측을 불허하는 럭비공 판사'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재판장 박태범 부장판사는 이날 이번 사건에 쏠린 비상한 관심을 의식한 듯, 이례적으로 선고내용이 결정된 과정을 방청객에 밝혔다. 박 부장판사는 "이 판결은 3인 재판부 전원의 합의는 아니다"라며 "3명이 충분하고도 격의없는 토론을 한 결과, 우배석 황규훈(주심판사)판사는 '피고인 4명 모두 진범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표결 결과 2대1로 확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부장판사는 검찰의 제3차 변론재개 신청에 대해서도 표결결과 2대1로 거부키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선고공판이 열린 부산지법 103호 법정에는 5백 여명의 방청객과 취재진이 몰려 좌석 2백40개를 꽉 채우고도 법정주변을 발디딜 틈 없이 가득 메웠다. 재판부는 미국의 OJ심슨 재판처럼 이례적으로 TV카메라와 사진기자들에게 선고 공판정을 공개해 40여명이 카메라를 들고 취재경쟁을 벌였다.
판결문 낭독에 걸린 시간은 15분. 3명의 피고인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자 재판정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원피고인의 아버지 원철희씨(56)는 부인과 함께 "정의는 승리한다"며 만세를 불렀다. 남양의 어머니도 "너무 기쁘다"며 반겼다. 반면 사형이 선고된 이양의 어머니는 오열하며 재판정에 쓰러졌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경찰수사 과정에서의 가혹행위를 인정했다.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로 보인다"는 재판부의 판단은 결국 검찰과 경찰이 "가혹행위를 통해 짜맞추기 수사를 했다"는 결과로 귀착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경찰은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된 북부서 경찰관 14명에 대한 수사 등 한차례 홍역을 치루게 됐다.
이 사건 재판은 갖가지 진기록을 남겼다. 13차 공판도중 98명의 증인이 소환됐고 수사 및 공판기록도 4천여쪽이 넘는다. 재판부 직권으로 현장검증도 재실시됐다. 검찰 구형이후 변론재개 신청이 받아들여져 한 사건에서 구형과 피고인 최후진술이 2차례 반복되기도 했다.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 사형과 무기징역을 구형받기도 했던 당시 피고인들은 대법원의 확정판결 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러나 '진실만을 말했다'는 강양의 이종사촌언니가 진정 말하려 했던 그'진실'이란게 무엇인지…그것이 알고 싶은 것이다.
비교적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피고인들의 알리바이 증거가 하나 둘씩 제시되었고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들에 대한 법의학자간의 논란이 본격화 되면서 재판부는 "머리카락 수집과정 및 분석결과는 물론, 사진 합성-전화통화기록 조작여부 등 이 사건의 핵심쟁점에 대해 재판부 직권으로 전면 재조사하겠다" 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나섰다.
1994년 12월 26일, 6차 공판. 남피고인 증인으로 나온 D여자전문대 정모교수는 남피고인의 범행 당일 대리시험 가능성을 부인했다. 또 남피고인의 같은 과 친구 6명도 "남양이 사건 당일 타자실에서 숙제를 하고 타자시험을 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이처럼 범인을 가리기 위한 무수한 증거가 제시됐고 증인들이 나섰으며, 경찰과 검찰의 강압수사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전개되면서 강주영양 유괴살인사건은 해를 넘겨 구형(求刑)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1995년 1월 20일, 재판이 구형과 선고만 남기고 막바지로 접어든 가운데 남피고인의 유력한 알리바이 입증자료가 새로 제시됐다.
부산지법 제3 형사부의 사실조회촉탁에 따라 한국통신 부산전산국이 법원에 제출한 전화통화내역에 따르면 남피고인은 강양 살해 시간대인 지난해 10월10일 오후 5시30분16초부터 약48초간 부산 중구 남포동 에밀커피숍에서 부산 서구 충무동 가위손 미용실로 전화통화를 했다.
재판부의 사실조회촉탁에 의한 전화통화기록은 피고인이나 변호인측에서 제출한 것과는 달리 명백한 증거능력을 갖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남피고인이 이날 부산 사하구 괴정동 학교에서 중간시험을 치른 뒤 오후 3시쯤 학교친구 이모양과 함께 시내로 나와 가위손미용실에서 놀다가 남자친구 김모군과의 약속으로 혼자 에밀커피숍으로 가 2시간 가량 얘기를 나눈 뒤 살해시간인 오후 5시30분쯤에는 미용실에 있던 이양과 전화통화를 하고 다시 미용실로 갔다는 주장과 이양-김군 등의 법정증언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
1995년 2월 13일. 12차 공판에서 변호인측은 주범(主犯)으로 기소된 원피고인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증거를 제시했다. 변호인측은 증인 이모씨가 "작년 10월9일 대구에 있는 아들의 유치원 운동회에 참석, 오후 1시30분쯤 비디오를 찍었는데 이 비디오에 원피고인이 나온다"고 증언함에 따라 원피고인의 범행가담 사실을 부인했다.
이에 대해 검찰은 "그렇더라도 원피고인이 대구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오후 4시쯤 범행 모의 현장에 합류하는데 지장이 없다"며 맞섰다. 그러나 흥미진진한 본격적인 맞대결은 머리카락을 둘러싼 법의학자간의 공방이었다. 변호인측은 검찰측에서 제출한 서울대의대 법의학교실의 머리카락에 대한 유전자감식 결과와 관련, "감식방법에 의문이 있는 등 증거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고려대의대 법의학교실 황적준교수를 증인으로 내세웠다. 검찰측 증인인 서울대 이정빈교수는 "1차 감정결과에서 32올 중 13올은 강양, 2올은 이모피고인의 것으로 추정됐으나, 추가검사 결과 6올만이 강양의 것으로 보였고 이피고인의 것으로 보였던 2올은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2차 감정은 미토콘드리아내 2개 과변이 부분 중 1개 부분의 전부와 다른 1개부분의 대부분을 검사한 결과"라며 감정결과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변호인측 증인인 고려대 황교수는 "미토콘드리아 염기서열 분석법은 유전자 중 2개 과변이 부분 모두를 검사하는 것이 필수"라며 "일부만 감식한 결과로 동일인임을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에서 원피고인 등 무죄를 주장해온 피고인 3명은 최후진술에서도 계속 무죄를 주장했고, 강양의 이종사촌 언니인 이피고인만 "지금까지 진실만을 말했다"고 진술했다. 한편 검찰은 이날 원피고인에게는 사형을, 이피고인과 옥영민, 남모피고인 등 3명에게는 무기징역을 각각 구형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반전(反轉), 2월 24일 사형 및 무기징역이 구형됐던 피고인 3명에게 무죄가 선고됨으로써 이들은 이날 석방됐다. 원피고인 등의 범행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고 알리바이 등 다른 증거에 비춰볼 때 범인이라고 보기 어렵다는게 재판부의 설명. 머리카락에 대한 유전자 감정에 대해서는, "머리카락이 범행에 사용된 승용차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 어렵다"며 증거채택을 배척했다.
이 사건은 항소심에 가서도 반전과 반전을 거듭했고 피고인들의 형량이 사형과 무죄, 극과 극을 오르락내리락 했다. 결국 재판부는 범행에 사용했던 프라이드 승용차 안에서 수거한 머리카락이 누구의 것인지 단정하기 힘들고, 원피고인 등의 시간대별 알리바이가 조작됐다는 주장도 신빙성이 없는 등 이들 3명의 범행사실을 입증할 만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음을 밝혔다.
또한 이피고인은 성행 및 지능-환경-범행후의 정황 등 여러 상황을 고려, 사형은 부당하다고 판단,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95년 12월 8일 대법원. 강양의 이종사촌 언니 이현숙 피고인에게는 무기징역을, 원피고인 등 나머지 4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함으로써 이 사건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후……
96년 4월, 남모 피고인은 이 사건과 관련, 국가를 상대로 2억5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으며 원모씨와 옥모씨 역시 강압수사와 고문, 장기간의 부당한 구속으로 인한 정신적인 충격과 후유증을 이유로 2억원의 국가배상금 지급신청을 배상심의위원회에 제출했다.
'지금까지 진실만을 얘기했다'는 강양의 이종사촌언니 이현숙씨는 6년째 수감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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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돌출판결”…안기부 ‘보안법 위헌제청’ 보복 보고서
한겨레 | 입력 2010.04.12 15:00 | 수정 2010.04.12 15:10
[한겨레]경찰 고문 자백의혹 부산유괴사건
이례적 신체검증 뒤 무죄선고 하자 안기부 "돌출판결 잦다" 악의적 폄하
한홍구 교수가 쓰는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46. '돌출판결'과 안기부 보고서
이례적인 신체검증과 무죄
1994년 10월 부산에서 8살 난 강주영양이 유괴살해되었다. 부산 북부경찰서는 강양의 사촌언니 이아무개양과 친구 3명 등 4명을 범인으로 구속하면서 이 사건을 신세대들이 지존파(부자들을 증오한다며 연쇄살인)를 모방해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경찰의 발표가 있자, 공범으로 지목된 3명의 가족과 친구들이 경찰서를 찾아가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지존파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에 발생한 유괴살인사건의 범인을 신속하게 검거한 것을 치하하는 전화를 해오자, 포상에 눈이 어두워진 경찰은 수사 방향을 돌리지 않았다. 검찰도 한때 경찰 수사를 의심했지만, 구속기간까지 연장해가며 알리바이 주장을 깨기 위한 보강수사를 벌여 경찰이 발표한 4명 모두를 진범으로 단정해 기소했다.
11월21일 열린 첫 공판에서 피고인 중 이양을 제외한 3명이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했다고 재판부(부산지법 형사3부, 재판장 박태범)에 호소했다. 검찰은 피고인 중 남성 두 명에 대해 "옷을 완전히 벗기고 신체검사를 실시했으나 아무런 상처가 없다"는 부산구치소의 검사 결과를 제출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두 피고인에 대한 신체검증을 실시했다.
사건 발생 40여일이 지났지만, 이들의 몸에는 고문의 상처가 뚜렷했다. 변호인과 검찰은 무려 98명의 증인을 내세웠는데, 증인 중에는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던 중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맞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1995년 2월24일 재판부는 무기징역이 구형된 사촌언니 이양에게는 "언니, 언니 하며 따르던 사촌동생을 유괴살해한 것은 인륜에 반하는 죄로 용서할 수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지만, 다른 3명은 무죄를 선고했다.
안기부, 공명심 따른 돌출판결이라 비난
이 사건의 파장은 매우 컸다. 이미 부산변협 인권위원회가 진상조사소위(위원장 문재인)의 조사를 바탕으로 고문 경찰 14명을 대검에 고발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도 불가피해졌다. 언론의 관심이 고조된 이날 판결에서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법정에서의 사진촬영을 허용했고, 또 판결이 "재판부 3인이 일치된 의견을 보인 것은 아니며 토론을 거친 투표 결과 2 대 1이 나왔다"고 합의 과정을 공개했다.
안기부는 이 사건에 대해 3월8일자로 뒤늦게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법원, 박태범 부장판사 경고 문제로 고심>이란 제목의 보고서는 앞부분에서 "1. 대법원은 o 박태범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지난 2.25 강주영 양 유괴살해 사건 관련 ○○○(24세) 등 3명에 대한 무죄를 선고함에 있어 o '합의 비공개' 원칙을 무시하고, 사진촬영 허용은 물론 '2:1로 합의가 어려웠다'는 등 합의 과정을 공개하여 물의를 빚은 데 대해 o '합의의 비밀은 재판의 독립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어떠한 이유든 공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내부 방침을 결정하고 박태범 판사에 대한 경고 조치를 검토 중인바 2. 이에 대해 박태범 부장판사는 o '합의 공개는 고의적인 것이 아니라 동 사건의 주심판사인 황규순(35세, 사시 32회, 경남 고성) 판사가 자신은 동인들에 대한 무죄 선고에 서명할 수 없다고 주장, 선고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o 주심판사 주장을 언론에 공개하는 조건으로 서명을 받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부득이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고 있어 고심 중이라 함"이라고 쓰고 있다.
합의과정 공개 논란
그런데 이 보고서는 정보보고의 신속성이란 면에서는 완전 뒷북을 치고 있었다. 3월8일자인 이 보고서에서 대법원은 "박 판사에 대한 경고 조치를 검토 중"이라고 했지만, 이미 대법원은 7일에 전국법원에 공문을 보내 "법원조직법 65조는 '심판의 합의는 공개하지 아니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합의의 비밀은 재판의 독립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인 만큼 사건이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등의 이유만으로 합의 내용을 공개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런 사실은 7일자 주요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럼에도 안기부가 보고서를 작성한 것은 "3. 이와 관련, 법조계에서는 o그동안 지나친 돌출판결로 물의를 빚어왔던 박 판사가 자신의 공명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판사로서의 존엄성을 실추시켰다고 박 판사를 비난하고 있다 함"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안기부의 바람과는 달리 법조계나 언론은 합의 공개에 대해 꼭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국민일보>는 박 판사가 "재판부의 합의 내용을 공개하고 법정 촬영을 허용한 것"은 "사법사상 획기적인 조치"라며 이를 두고 대법원이 "발끈"한 것에 대해 "재야 법조계에서는 이것이 법원의 구태의연함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로 본다고 전했다. <중앙일보>도 합의 과정 공개는 "판결 결과가 최대한 신중한 합의를 거쳐 도달했다는 신뢰감을 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경우 평결 결과와 소수의견은 공개되고 있다.
소신판결인가, 돌출판결인가?
안기부 보고서가 악의적으로 비난한 박태범 판사의 돌출판결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사실 80, 90년대에 활동한 법관 중 박 판사만큼 시국사건과 일반사건 양쪽 모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법관도 없다. 박 판사가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6월항쟁 직전인 1987년 6월3일 '보도지침'을 폭로한 혐의로 국가보안법 위반이 적용된 김주언, 김태홍, 신홍범 등 3명에게 국가보안법 일부 무죄를 포함하여 집행유예와 선고유예로 석방한 때였다. 이때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집행유예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재판장의 '의연한 진행'이 돋보였다고 평가했지만, 이 재판도 약간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김정남의 회고록에 따르면, 처음에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신청한 4대 일간지 편집국장과 간부들, 문공부의 홍보정책실장 등 23명을 모두 증인으로 채택하는 등 "공정한 재판을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부가 곧 증인채택 조치를 취소하는 등 '무엇인가 석연찮은 일'이 계속되었다. 판결 당일 박태범 판사는 "검찰, 변호인, 피고인 모두가 재판이 진지하고 성실하게 진행되도록 노력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본 재판장 역시 최선을 다했으나 능력이 부족한 탓에 모든 재판절차를 뜻대로 진행하지는 못했다"며 심경을 토로한 뒤,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20여명의 취재기자를 포함해 전현직 언론인이 대부분이었던 방청석에서는 집행유예와 선고유예 판결이 나오자 "퇴정하려는 재판장을 향해 요란스럽지 않은, 그러나 힘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는 고무신이 날고, 야유와 소란이 상례화가 된 시국사건 재판도 "법관의 공정하고 성의 있는 자세에 따라 전혀 모습을 달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박태범 판사는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특히 엄격했다. 그는 1987년 1월 치료기구 납품 부정사건과 관련해 약식기소된 의대 교수 등을 정식재판에 회부했고, 1995년 2월에는 대출비리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된 조흥은행 간부 4명을 법정구속했다. 그는 부산지법에 있을 당시에 자식을 성폭행하는 등의 반인륜범죄, 공무원 범죄나 화이트칼라 범죄 등에 대해서는 구형량의 2~5배나 되는 중형을 선고했고, 검찰이 불구속 기소나 약식기소한 공무원이나 지도층 인사를 석 달 동안 30여건이나 정식재판에 회부했다. 이 때문에 구치소의 피고인들 중 죄질이 나쁜 자는 제발 박태범 판사에게 걸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강주영양 사건 이외에도 고문으로 억울하게 살인 혐의를 쓰고 사형이 구형된 서보원씨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이 때문에 <중앙일보>는 1994년 12월18일치에 "요즘 부산시민들 사이에는 '호랑이 판사'로 화제를 모으는 법관이 있다"며 한 면을 할애해 인터뷰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의 이런 "소신판결"에 대해 언론은 "재판부의 추상같은 엄정성을 밝힌 것으로 오랫동안 재판부가 정권에 끌려다녔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법원의 권위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세계일보>)고 소개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동아일보>)한다고 덧붙였다.
국가보안법 위헌심판 제청이 진짜 이유
특정 법관이 '돌출판결'로 주위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든 말든 그것은 안기부의 직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당시 안기부가 진짜 주목한 박 판사의 '돌출' 행동은 이 보고서가 작성되기 채 두 달이 되기 전인 1995년 1월17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국제사회주의자들(IS) 소속의 피고인 4명을 직권보석으로 풀어주면서 국가보안법 제7조 1, 3, 5항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한 결정일 것이다. 박 판사는 "주관적이고 모호한 표현으로 해석 기관의 자의에 따라 행위자 내심의 의사가 범죄가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면서 "서구의 여러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세계화의 시대에는 참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헌제청에 대해 보수 언론들조차 "문제의 조항 7조는 이미 1990년 4월 헌법재판소로부터 사실상 위헌이라고 할 수 있는 '한정합헌' 판정을 받은 규정"으로 "재판부의 위헌제청 결정에 대해 법학자들과 변호사들은 대체로 공감하는 입장"이라고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안기부는 1994년 1월의 안기부법 개정에 따라 수사권이 대폭 축소된 상황에서 이의 회복을 위해 전방위 노력을 계속했는데, 박 판사가 국가보안법 위헌 논란에 다시 불을 지른 것이다. 안기부의 박태범 판사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서는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성공회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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