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말 이후 집행되지 않는 사형제 진상은?
이 글은 ‘다음’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서도원·하재완·도예종·김용원·우홍선·송상진·이수병·여정남…. 이들은 이른바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휘말려 유신 시절이던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은 지 약 20시간 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해외에서 국제사면위원회를 중심으로 구명운동이 한창 벌어지던 중이었다
20시간-. 그 짧은 시간에 8명의 사형수는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의 사형수는 죽지 않는다. 1997년 12월30일 23명의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이 있은 후 7년이 넘도록 단 한 건의 형 집행도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5월 중순 현재 우리나라의 사형수는 모두 59명이다. 그 가운데는 형이 확정된 후 12년7개월이나 생존해 있는 경우도 있다. 형이 집행되지 않는 상태이니 겉으로 보기에는 무기징역형을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들은 매일 새벽녘부터 관례상 사형이 집행되는 오전 10시까지 공포의 시간을 보낸다. 갑자기 누가 자신을 불러 어디론가 데려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다음날 새벽까지는 안심이다.
<매일 죽는 시람>이라는 조해일의 소설 제목처럼 그들은 매일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그런 시간이 12년7개월이라면 어떨까? ‘그만큼 인권의식이 늘어난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지만, 사형수들로서는 오히려 가혹한 학대는 아닐까?
사형 집행 명령권은 법무부 장관에게 있다. 법무부 장관은 통상 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가 50여 명에 이르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사형을 집행한다. 형 집행은 장관의 명령이 있는 날로부터 5일 이내에 하도록 돼 있다. 사형 집행은 전국 5개 구치소와 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동시에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사형수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집행인을 포함해 누가 산 사람을 죽이는 데 망설임이 없겠는가? 그렇다 보니 최근 들어 사형 폐지론이 부쩍 확산하는 추세다.
유명한 형법학자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1974부터 1976년까지 법무부 장관을 지낸 황산덕 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재임 중 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에게 사형 집행 명령을 내렸지만, 일반 사형수에 대한 집행 명령서에는 결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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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폐지론이 힘을 얻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열린우리당 유인태 의원이 발의한 ‘사형 폐지에 관한 특별법안’이 여야 의원 175명의 동의를 받아 2004년 12월9일 국회에 제출됐다. 이 법안은 12월10일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지난 2월 법사위 전체회의에 상정돼 현재 법안심사제1소위에 계류돼 있다. 이번에는 특별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 지난 15대 국회 때는 유재건 의원이 발의하고 91명이 동의했으며, 16대에서는 정대철 의원이 발의하고 155명이 동의해 특별법안이 제출됐지만, 단 한 차례의 논의도 거치지 못한 채 자동폐기된 법안 아니던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1997년 12월30일까지 사형 집행된 수는 902명이다. 1990년 이후 최근까지는 7차례에 걸쳐 총 89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마지막 사형 집행으로 기록된 1997년 12월30일 23명이 무더기로 사형집행된 경우를 보자.
김영삼 정부 말엽이던 1997년 연말, 이듬해 2월 김대중 정부 출범을 앞두고 흉악범죄를 저지른 사형수들에 대한 형이 집행됐다. 이날 사형이 집행된 사형수는 여의도 자동차 질주사건의 김용제(당시 27세) 등 23명으로, 여자 4명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의 사형 집행은 1976년 27명이 집행된 이후 최대 규모였다. 사형수 중 일부는 안구와 시체를 기증해 지상에서 마지막 선행을 베풀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7차례에 걸쳐 89명의 사형이 집행됐다. 그 내용을 한번 뜯어보자.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받은 시국사범이나 사상범은 한 명도 없이 전원 흉악범이라는 사실이 예전과 달라진 점이다.▷1990년 4월17일 9명 집행=서울구치소 7명, 부산구치소와 대구교도소에서 1명씩. 이들은 모두 살인·강도살인·강간살인 등 흉악범들로, 공안사범은 없었다. 1980년대는 사형 집행된 77명 중 공안사범이 11명 들어 있었다.
▷1990년 12월4일 5명 집행=서울구치소와 부산구치소 2명씩, 광주교도소 1명. 마찬가지로 강간살인·강도살인 등 흉악범들이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사후 안구와 콩팥을 기증했다.▷1991년 12월18일 9명 집행=서울구치소 8명, 광주교도소 1명. 전원 성폭행 후 살해 등의 흉악범죄를 저지른 경우였다.
▷1992년 12월29일 9명 집행=서울구치소와 대구교도소 두 곳에서 이뤄졌다. 어린이 납치, 살해 등 죄질이 나쁜 흉악범들이었다. ▷1994년 10월6일 15명 집행=서울구치소 10명, 부산구치소 2명, 대구교도소 3명. 연쇄 강도·강간 및 불특정 다수 살해 등 흉악범들이었다. ▷1995년 11월3일 19명 집행=서울구치소 15명, 대구교도소 2명, 부산구치소와 광주교도소가 1명씩이었다.
▷1997년 12월30일 23명 집행=서울구치소 4명, 부산구치소 6명, 대구교도소 5명, 대전교도소 6명, 광주교도소 2명. 전원 흉악범이었으며 4명이 사후 안구를 기증했다.
확정판결 후 12년 7개월 된 ‘최장기 사형수’
현재 우리나라의 미집행 사형 확정자는 59명이다. 중국인이 3명 포함돼 있으며 모두 남성이다. 1999년까지만 해도 2명의 여성 사형수가 있었으나 무기로 감형되면서 ‘여성 사형수 없는 나라’가 됐다. 59명의 형 확정 후 평균 복역기간은 7년. 나이는 80% 정도가 30~40대다.
12년7개월이나 사형 집행이 미뤄지고 있는 사형수는 48세로, 현주건조물(주거용 건물) 방화치사상 혐의로 기소된 경우다. 그는 부인이 특정종교에 빠져 가정을 등한시한다며 해당 종교회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 방화로 15명이 사망하고 25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현재 기독교에 귀의해 모범수로 지내고 있는데, 기독교계 인사들이 “가정파탄을 두려워한 우발적 범행이었음을 참작해 달라”며 무기(無期) 감형을 탄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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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들은 서울구치소·대구구치소·부산구치소·대전교도소·광주교도소 등 5곳에 분산 수용돼 있다. 사형수는 형이 집행되지 않은 미결수 신분이기 때문에 기결수가 수감되는 교도소 대신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이 원칙이다. 대전과 광주에는 구치소가 없기 때문에 사형수를 교도소에 수감하고 있다.
사형수 59명은 모두 살인범죄자들이다.
그 중 47명(81%)이 2명 이상을 살해한 경우다(3명 이상을 살해한 경우 20명, 10명 이상 살해한 경우 2명). 1명을 살해한 경우도 유괴 살해, 사체 훼손(토막살인 등) 등 반인륜적 흉악범죄를 저지른 것은 마찬가지다. 사상범이나 공안사범으로 사형 대기 중인 사람은 없다. 1심 판결을 기준으로 국가보안법과 그 전신인 반공법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1988년 1명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1971년만 해도 한 해 24명이 반공법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968년부터 1978년까지 같은 죄를 적용해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한 해 평균 9.4명꼴이었다. 이후 1980, 81년 각각 6명과 4명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그렇다면 59명의 미집행 사형수의 면면은 어떠할까? 필자는 여러 경로의 자료 입수를 통해 59명 대다수의 신상을 파악했다. 그러나 재심청구 중인 사건이 있는데다 사형수와 피해자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살아 있으므로 구체적인 사건과 이름 등을 공개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다만 사건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경우를 중심으로 범죄사실 등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사형수1(48세):현주건조물 방화치사상 혐의로 사형을 확정받고도 가장 오래 미집행 상태로 복역 중이다.
▷사형수2(63세):살인·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기소돼 2004년 9월 사형을 확정받았다. 특정 종교를 이탈·비방한 신자 6명을 교주의 지시를 받고 연쇄 살인하고 야산에 암매장했다.
▷사형수3(29세):강도살인·사체유기 등의 죄로 2003년 3월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 공범과 함께 2002년 4월27일부터 승용차를 택시로 위장해 몰고 다니며 3일간 여성 5명을 살해했다. 사체를 은닉하기도 했으며, 경찰에 체포됐다 도주한 공범은 자살했다.
▷사형수4(56세):죄명은 살인·살인미수·살인예비·절도 등. 2001년 한 건강원에서 일행과 함께 화투를 치다 싸움을 벌여 한 사람을 숨지게 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중상을 입힌 뒤 달아났다. 같은날 오후 인근 주점에 들어가 2년 전 자신이 노점상을 할 때 영업을 방해했다며 내실에서 잠을 자던 주점 주인을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이틀 뒤에는 충북 단양군의 한 사찰을 찾아가 자신이 그곳에서 생활할 때 학대했다는 이유로 주지 부부를 살해하고 3만여 원을 빼앗았다.
강간·살인·시체유기, 그리고 부자에 대한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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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범행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 심하게 부패한 사체를 꺼내 시너를 뿌리고 태우기도 했다. 사체를 불태우면서 삼겹살과 소주를 먹는 등 엽기적 행각을 벌였고, 타다 남은 뼈를 인근 하천에 버렸다.
▷사형수6(38세):1996년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조직폭력배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데 앙심을 품고 폭력배들이 운영하는 단란주점으로 찾아가 3명을 구타했다. 입원한 피해자를 인근 병원으로 찾아가 살해하고, 문병 온 피해자의 친구까지 각목으로 때려 숨지게 했다.
▷사형수7(30대 중반):연쇄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 사이에 부산·울산·경남 등지를 돌아다니며 철강회사 회장 부부 등 모두 9명을 잇달아 살해했다. 유복자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부자에 대한 증오심을 키웠다고 한다.
▷사형수8(49세):1998년 강간살인 등을 저질렀다. 슈퍼 앞에서 놀던 남아와 여아를 소형 어선으로 유인해 추행 및 강간하려다 실패하자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뒤 밧줄에 묶어 바다에 버렸다. 아내와 이혼한 뒤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전셋집에서 혼자 생활하다 범죄를 저지른 경우였다.
▷사형수9(48세): 살인·약취유인·사체은닉 등의 혐의. 1998년 놀고 있는 아이에게 접근해 가정형편과 전화번호를 알아낸 뒤 목을 졸라 살해하고 집으로 협박전화를 걸었다. 전화의 음성이 공개되는 등 수사망이 좁혀오자 노숙자를 시켜 “내가 죽으면 아이도 함께 죽는다”는 협박편지를 경찰에 보내고는 노숙자를 살해해 버렸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복역하면서 유괴 수법을 배운 것으로 드러났다.
▷사형수10(37세):2000년 강간살인·강간치사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열한 살짜리 소녀를 야산으로 끌고 가 양손을 묶고 강간하려다 소녀가 실신하자 목을 졸라 살해했다. 길을 가던 17세 소녀를 강간하는 과정에서는 반항하는 피해자의 남동생을 목 졸라 죽이고, 소녀는 야산으로 끌고 가 칼로 속옷을 잘라 강간한 후 목과 가슴 등을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사형수11(39세):살인 등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돼 2000년 사형이 확정된 경우. 동료 조직원을 살해한 후 비밀 유지와 공범 간 결속 강화를 명목으로 사체의 장기 일부를 꺼내 조직원들과 나눠 먹는 엽기적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사형수12(34세)·사형수13(35세)·사형수14(30세):1996년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청부폭력을 저지른 적이 있는 피해자 등 일행 5명을 휴게소 주차장에서 기습해 가슴과 머리 등을 수차례 흉기로 찔러 그 중 1명을 살해했다.
▷사형수15(47세):살인죄로 2003년 2월 사형 확정. 가정폭력 혐의로 구속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지 2주일 만에 의붓딸 상습폭행 등의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석방된 후 자신을 고발한 데 앙심을 품고 부인과 두 의붓딸, 친딸, 친아들 등 일가족을 흉기로 살해했다.
▷사형수16(25세): 존속살해 혐의로 2004년 6월 사형이 확정됐다. 카드빚 8,000만 원을 갚아 주지 않는다며 할머니와 어머니를 살해한 뒤 도주했다. 도피 중 여자친구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오늘 식구들 작업하려다 실패했다. 엄마랑 할머니까지 성공했고 형도 거의 성공했는데 아빠만 남았다. 아빠는 현관에서 도망갔다”며 범행을 털어놓기도 했다.
중국인·조선족 출신 사형수도 포함
▷사형수17(33세):강도살인 등의 죄목으로 1996년 사형 확정. 다른 범죄로 수감생활을 하다 출소한 지 2개월 만인 1995년 4월 인천의 한 모자원에 침입해 잠을 자던 여성을 강간하려고 했다. 피해자가 반항하자 목·등·가슴 등을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같은해 9월까지 모두 6차례의 강도강간을 저질렀다.
▷사형수18(29세): 강도·살인 등으로 1997 사형 확정. ‘지존파’를 모방해 ‘막가파’라는 폭력조직을 만든 뒤 단란주점 여주인을 납치해 돈을 빼앗고 산 채로 땅에 묻었다. 유흥업소를 무대로 거대한 폭력조직을 만든다는 목표 아래 자금 마련을 위해 생선회칼 등 범행 도구를 갖고 다녔다. 외제 차를 타고 다니는 피해자를 미행해 집을 알아낸 뒤 집 근처에서 기다리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사형수19(48세): 살인혐의로 2003년 사형 확정. 테니스장에서 만난 부부에게 ‘서울대 명예교수’라며 접근한 뒤 “정선 카지노를 인수하면 총지배인을 시켜주겠다”고 속여 투자금 명목으로 1억8,000만 원을 받아 챙겼다. “카지노 사업을 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피해자를 중미산 통나무 산장으로 불러 전자 충격기로 실신시킨 뒤 흉기로 살해했다.
▷사형수20(34세):강도살인 등의 혐의가 인정돼 2003년 사형 확정. 전직 의사인 피해자에게 접근해 “달러로 바꿔 주겠다”며 현금 3억 원을 준비하게 한 후 집으로 찾아가 피해자 일가족을 야구 방망이로 때려 살해하고 3억 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사형수21(31세):살인죄로 2003년 사형이 확정된 사채업자. 2억 원의 돈을 갚지 않으려고 피해자를 납치 감금한 후 살해하고 사체를 불태웠다. 자신의 범행을 자살로 위장하려고 피해자 가족에게 “아버지·누나 미안해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돈을 갚지 않는 다른 피해자를 납치해 살해하기도 했다.
▷사형수22(47세·조선족):1996년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조선족 선원들과 함께 원양어선 선상에서 반란을 일으켜 한국인·조선족·인도네시아인 등 11명을 차례로 살해했다. 범행 후 배를 탈취해 일본으로 밀입국할 작정이었으나 연료 부족으로 미수에 그쳤다.
▷사형수23(41세)·사형수24(39세)·사형수25(41세)·사형수26(39세): 1996년 모 은행 출장소 앞에서 현금 등을 수송하던 직원 2명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돈자루를 빼앗아 달아난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사형수27(33세): 강도살인 등의 혐의로 재판받고 2002년 사형이 확정됐다. 귀가하던 20대 여성을 납치해 금품을 빼앗고 성폭행한 뒤 목졸라 숨지게 하는 등 3명의 부녀자를 살해했다. 자신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한 뒤에도 범행 은폐를 위해 시신을 침대 밑에 숨기기도 했다.
▷사형수28(29세·중국인):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온 뒤 용돈 마련을 위해 주택에 침입해 여성을 성추행하고 살해하는 등 두 차례 강도살인을 저질렀다. 8차례 강도살인미수 혐의도 추가돼 2001년 사형 판결을 받았다.
▷사형수29(35세):살인·살인미수·사체유기 등의 혐의가 인정돼 2001년 사형 확정.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내연녀와 짜고 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했다. 범행 후 내연녀까지 살해하고 자신의 아내마저 살해하려다 중상을 입혔다.
이상에서 보듯 사형수들이 연루된 사건은 죄다 잔인한 살인으로 얼룩져 있다. 범행이 잔인했던 탓에 그들은 극형을 선고받고 집행 대기 중이다. 문제는 그들을 사형시키는 데도 사람이 행하는 절차가 뒤따르고, 그것은 사형 집행이라는 ‘실무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이 된다는 점이다. 아무리 제도와 법절차에 따른 것이라지만 사형에도 인륜이 닿아 있기 때문에 이런 고통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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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짧은 두 달이 지나면 그들은 극도로 예민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심리상태가 불안정해지면 가족을 많이 찾고 다른 재소자와 자주 다투는가 하면 교화 업무에도 협조하지 않기 일쑤다. 연쇄살인 등 사회적 충격이 큰 인명살상 범죄가 발생하면 사형수들의 불안은 한층 고조된다.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거나 범죄 소탕 의지를 다지는 차원에서 미루던 사형 집행을 실행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는 그러한 안도와 불안이 교차하는 가운데 10년 이상 미집행 상태로 지낸 사형수도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들어서는 형 집행 대기 기간이 그보다 조금 짧아져, 가장 오래 연명한 경우가 7년가량이었다. 연쇄살인범처럼 의문의 여지가 없는 범죄로 형을 확정받은 경우는 대부분 1~2년 안에 형이 집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사람을 죽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사형수가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는 절차를 통해 살펴보면 이렇다.어느 날 교도소로 사형수 대여섯 명을 지목하면서 “사진을 촬영하고 건강을 진단해 결과를 보고하라”는 대검찰청의 지시가 떨어진다. 교도관들은 사형 집행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한다. 교도소 측은 어떤 사형수가 형 집행 대상인지 알 수 없게끔 수감 중인 사형수 전원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고 건강검진을 한다. 하지만 사형수들은 신체검사를 받으면서도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그로부터 3~4개월이 지나면 구치소장 앞으로 법무부 장관 명의의 사형 집행 명령서가 날아든다. 보통 집행 하루 전이다.관련 규정에는 사형 집행시에는 수사 검사를 비롯해 구치소장·교무과장·의무관·교도관 등 구치소 관계자들이 의무적으로 참석하도록 돼 있다. 목사·신부·스님 등 사형수 교화작업을 담당하는 종교인들도 참석한다. 구치소 교무계에서는 형 집행 전날 저녁 이들 종교인에게 “급한 일이 있으니 내일 아침 일찍 구치소로 나와 달라”고 연락한다. 형 집행이 외부로 알려지는 최초의 순간이다. 사형수 가족들에게는 형 집행이 끝난 뒤 사체를 인수해 가라는 통보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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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 저격범 문세광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이른 새벽에 사형이 집행됐다. 하지만 통상적인 사형 집행은 1970년대 이후 오전 10시로 굳어졌다. 이 때문에 사형수들에 대한 건강진단이 있고 난 뒤 어느 날, 이른 아침부터 사형장 청소가 시작되면 재소자들은 ‘일’이 닥쳤음을 눈치챈다.
형 집행이 있는 날은 아침 운동이 없고 평소 틀어 주던 방송도 나오지 않는다. 구치소 내의 통로 출입이 봉쇄되면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시간이 흐르고 ‘연출조’(사형수를 감방에서 형장으로 데려가는 교도관) 3명이 사형수들이 생활하는 감방문 앞에 나타난다. 연출조는 있을지도 모르는 사형수들의 난동을 우려해 형장으로 향하는 문에서 가까운 방부터 전체 사형수의 번호를 일일이 부른다. 이때는 교도관들도 극도의 긴장감을 느낀다고 한다. 아무 탈 없이 사형수를 집행장으로 데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교도관들은 그런 다음 “OOOO번, 체중검사! 빨리 나와!”라거나 “전방(轉房:방을 옮김)!”이라고 외친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해당 사형수에게는 형 집행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사형수가 임박한 ‘마지막’을 확인하는 것은 감방문을 나서서 사형 집행장으로 가는 길목(이곳을 사형수들은 ‘지옥 3정목’으로 부른다)으로 들어서면서부터다. 사형수가 눈치를 채는 것과 동시에 교무계장과 종교 담당 교도관이 사형수에게 바짝 다가가 손을 잡으면서 우회적인 표현으로 형 집행을 알린다.
기독교에 귀의한 사형수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불교 신자한테는 “극락에 가도록 하자”는 식이다.아무리 신앙심이 깊어도 이 상황이 되면 사형수는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거나 “못 간다”면서 뒤로 뻗대기도 한다. 하지만 태연하게 걸어가면서 자신의 팔을 붙잡고 함께 걸어가는 교도관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윽고 사형수는 형집행장으로 들어선다. 벽을 따라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20명쯤 되는 형 집행 참석자들이 서 있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사형수는 마룻바닥에 깔린 돗자리 위에 앉혀진다. 사형수의 좌우로는 교무계장과 종교 담당 교도관이, 뒤로는 ‘연출조’가 자리 잡는다. 사형수 앞에 놓인 높이 50~60cm의 강단에는 검사·구치소장·입회서기 등이 앉아 있다.
사형 집행은 ‘집행관’인 구치소장의 인정신문(人定訊問)으로 시작된다.
“(죄수번호가) 몇 번이죠?” “성명은?”
“본적은?”
“주소는?”
“생년월일을 말씀해 보세요.”
사형수가 답을 하면 사형수에 대한 죄목이 낭독된다. 이 대목에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형수가 종종 있다. “죄가 없는 사람을 왜 죽이느냐”며 욕을 하거나 저항하는 경우다. 남성철 전 서울구치소장처럼 사형수가 원하는 시간만큼 유언을 할 수 있도록 인내하고 배려하는 경우도 물론 있지만, 집행인들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빨리 끝내기 위해 절차를 서두르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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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유언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형수도 있다. 그렇다고 형 집행이 미뤄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형이 집행된 뒤 진범이 뒤늦게 붙잡혀 충격을 준 경우가 실제로 있었다. 1997년 사형당한 최은수 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금고털이를 하다 살인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유언을 하면서 “오판한 판·검사와 위증자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종교인이 진행하는 의식과 유언 절차가 마무리되면 사형수의 머리에 하얀 용수를 씌운다. 동시에 손과 발을 밧줄로 묶는다. 커튼이 드리워지고 나면 굵은 밧줄이 사형수의 목에 걸린다. 그런 다음 사형수가 앉은 자리 밑을 일시에 뻥 뚫리게 하는 ‘포인트’를 당긴다. 덜컹 하고 바닥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사형수의 짧은 외마디 비명이 스쳐간다. 밧줄에 묶인 사형수의 몸은 한순간 마루 바닥 아래에 있는 공간으로 떨어지고, 15~20분이 지나면 의무관이 사형수의 심장박동 등을 살펴 사망 여부를 확인한다. 관련 규정에 따라 사형수의 사체는 그러고도 15분을 더 매달아 둔다.
“굵은 밧줄을 좀 더 가늘고 질 좋은 것으로 바꿨으면 좋겠어요. 너무 굵어 목에 걸 때 무척 괴롭다고 얘기하는 사형수들이 있거든요.”한국기독교사형폐지연합회장인 문장식 목사의 말이다. 예전에 쓰던 낡고 굵은 동아줄이 목에 어정쩡하게 걸릴 경우 고통의 시간이 그만큼 길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사형 집행용 밧줄을 교체한 사람에게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속설 때문에 나서는 사람이 없다. 말 그대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다.
사형수가 생전에 장기나 시신 기증을 약속했을 경우 형집행장에는 의사들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형수 사체는 가족조차 돌보지 않아 공원묘지에 묻히고 만다. 사형이 집행된 그날 밤, 현장 입회인들 가운데는 악몽의 순간을 술로 달래는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고통이 지워질까?
최근 국내에서 사형제 폐지론과 존치론이 맞부닥치면서 논란이 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국가에 의한 또 다른 극단의 폭력”이라는 주장과, “피해자의 인권을 도외시한 채 살인자의 인권만 보호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는 형국이다.
현재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는 모두 83개 국이다. 나머지 국가들은 사형제를 폐지했거나 조건부로 폐지한 경우다. 우리나라도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10년 동안 형 집행이 없으면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는 국제 관례에 따라 조만간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될 전망이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165명으로, 한 해 평균 16.5명이었다, 그러다 2001년 이후 급감해 2001년 12명, 2002년 7명, 2004년 5명으로 줄었다. 10년 전에 비해 7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일반국민 34.1%가 사형제 폐지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1년 한국갤럽 조사 때는 ‘사형제 유지’가 54.6%, ‘사형제 폐지’가 31.3%였다. 하지만 유영철의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2004년 7월에는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87%, 폐지해야 한다는 응답이 13%로 각각 조사됐다. 사형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여론이 급격히 높아진 것이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살인 사건 등이 발생하면 사형제 유지론이 그만큼 힘을 얻는다는 얘기다.
여론은 여전히 사형제 존치 쪽으로 기울어 있다. 이는 최근까지도 별 변동이 없는 상황이다. 예컨대 1999년 12월 국정홍보처의 여론조사 결과 ‘존치’는 65.9%였다.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도 ‘존치’는 65.9%. ‘당장 폐지’ 13.2%, ‘언젠가는 폐지’ 20.9% 등이었다. 지난해 한국사회여론연구소의 조사 때도 ‘존치’가 66.3%로 높게 나타났다.
평생을 ‘사형제 폐지’에 바친 문장식(사형제 폐지를 위한 범종교연합 공동대표) 목사는 사형은 또 하나의 국가살인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문 목사는 “사형수는 1년 365일 아침에 죽었다 저녁에 살아나는 삶을 산다”는 양평 일가족 살인범 오모 씨의 말을 잊지 못한다.
정남기 프레스센터 이사장도 비슷한 견해다. “사람을 물어 죽인 개는 교화가 불가능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라 교화가 가능하다”는 것. 소설가 박완서 씨는 “이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 죽이는 일을 누가 좋아하겠느냐?”고 반문한다. 김영명 한림대 교수는 “사형제가 범죄 예방에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이 입증된 마당에 더 이상 사형제는 필요하지 않다”며 사형제 폐지에 찬성했다.
하지만 신건 전 국정원장의 입장은 좀 다르다. 그는 “과거에는 사형이 정치적으로 남용되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한 시대가 되지 않았느냐”면서 “제도 자체를 폐지하기보다 법률적으로 남용되는 경우가 없도록 법률을 정비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는 “사형 제도는 우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라고도 했다.
대검찰청의 K 검사장도 같은 입장이다.“선진국이라는 미국도 밤 늦은 시간에 마음 놓고 거리를 나다니지 못하는 실정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성들도 범죄를 특별히 의식하지 않으면서 밤 늦도록 거리를 걸을 수 있다. 이처럼 길거리에 조폭들이 활보하지 못할 정도의 환경이 된 것은 사형제를 근간으로 하는 치안 유지가 그만큼 확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섣부른 사형제 폐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교화협의회 위원인 홍남용 전 의정부 시장은 “100명의 교화위원이 애를 써도 한 사람의 사형수를 교화하기 힘든 게 현실”이라며 일선에서 느끼는 고충을 털어놨다. 민병두 열린우리당 의원의 견해도 비슷하다. 민 의원은 “생명의 존엄을 이유로 외란이나 내란, 흉악범까지 보호해 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며 “죽음에 대한 근원적 공포심에 기대는 사형제가 안전한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형제 존폐논란, 이번엔 결론 날까
교도관 출신으로 법무부 교정국장을 지낸 이순길 동국대 교수는 “사형수 1명을 돌보는 것이 일반 죄수 100명을 돌보는 것보다 더 어렵다”면서 “안정된 사회 질서를 위해 아직까지는 사형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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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동학농민기념재단 이사장은 “정치범을 제외한 존속살인이나 흉악범에 대한 사형은 찬성한다”는 중도적 입장을 표명했다. 채수찬 열린우리당 의원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채 의원은 “사형제도는 범죄 예방이나 피해자 보호 효과는 크지 않지만, 오판의 위험에 따른 ‘사법살인’과 정치적 악용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폐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며 “국민의 일반적 법감정을 고려해 우선 인명살상을 수반하지 않는 정치범·사상범의 경우부터 사형을 금지하는 쪽으로 가는 게 맞다”고 했다.
사형제를 둘러싼 여러 견해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 감정과 신념의 차이일 뿐, 옳고 그름을 논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구절을 옮기면서 글을 맺자. 백성이 요구하는 대로 죄인 바라바는 사면하고 무죄라고 믿어지는 예수의 신병은 군중에 넘겨주면서 빌라도가 하는 말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우리나라 사형 제도의 기원 형 폐지안을 대신들에게 내렸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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