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에 대한 맹목적 적개심에 여성 두 명 ‘묻지마’ 살해
불특정다수 노린 범행…자칫하면 더 많은 피해자 생겼을 수도
또 한 번 ‘묻지마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교인을 향한 맹목적인 적개심을 가진 30대 남성이 범인이다. 범인은 종교인이었던 처형에게 면박을 당한 뒤 특정종교를 믿는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러다 교회를 나오는 생면부지의 여성 두 명을 아무 이유 없이 잔혹하게 살해했다. 경찰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았다면 추가 피해자가 연이어 나올 수 있었던 아찔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악명을 떨쳤던 연쇄살인마들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 8일 오후 6시40분쯤 광주시 광산구 모 성당 앞에서 이 성당을 다니던 신도 염모(48·여)씨가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범인은 38세의 박모씨. 그는 ‘하지마’라고 비명을 지르는 염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그리고 박씨는 사건 직후 승용차를 타고 도주했다가 전남 나주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왔다. 그곳에서 박씨는 혈흔이 묻은 옷을 세탁했다. 그러나 집에는 이미 그를 잡기 위해 경찰이 잠복하고 있었다.
경찰은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박씨의 차량을 추적했고 박씨는 범행 3시간 만에 검거됐다. 광주 광산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어 병원 치료를 받아왔으며 특별한 이유 없이 염씨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교인이 싫어”
적개심 품고 범행
박씨를 조사하던 경찰은 한 가지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했다. 지난 3월 광주 북구에서 일어난 회사원 살해사건과 지난 5월 일어난 여의사 살해사건이 이번 사건과 비슷하다는 것.
지난 3월19일 새벽 1시쯤 광주 북구 중흥동 모 교회 앞 화단에서 회사원 김모(52)씨도 둔기로 머리를 맞아 숨진 채 발견됐지만 아직 범인을 잡지 못했다. 또 지난 5월20일 오후 8시20분쯤 북구 용봉동 모 교회 주변에서 숨진 여의사 안모(44)씨도 염씨와 마찬가지로 목이 찔려 살해당한 바 있다.
이처럼 광주지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서 박씨의 범행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경찰은 여죄가 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수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는 지난 5월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자백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지난 5월 중순 광주 서구 양동시장에서 흉기 3개를 구입한 뒤 북구 용봉동 교회 2곳 주변을 답사한 뒤 이 중 한 곳에서 1시간가량 배회하다 오후 9시15분쯤 홀로 교회에서 나오는 여의사 안씨를 발견했다.
그리고 박씨는 몰래 안씨를 뒤따라가 흉기로 목 부위를 찔러 살해했다. 언론에 이 사건이 보도되자 박씨는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남구 대촌동의 한 저수지에 버린 뒤 한동안 외출을 자제했다.
그러는 동안 박씨의 머릿속에서는 다음 범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8일 흉기를 들고 염씨를 같은 방법으로 살해한 것.
이처럼 박씨가 특정 종교인들만을 골라 살해한 이유는 종교인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세무공무원과 법무부 교정직공무원, 택시 운전사 등을 전전했던 박씨는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채 떠돌이생활을 했다.
그러다 2003년부터는 우울증까지 앓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직업도, 가정도 없는데다 우울증까지 걸린 아들을 보다 못한 박씨의 부모는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몽골인 여성 강모씨와 선을 보게 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 강씨와 결혼해 잠시나마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결혼생활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성격과 문화적 차이는 이들 부부를 가로막았고 결국 아내는 지난 5월 본국으로 돌아갔다. 아내를 잊지 못했던 박씨는 아내를 찾기 위해 몽골의 처가를 방문했다. 그러나 처남과 처형은 “동생이 죽었으니 찾지 말라”는 말로 그를 문전박대했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자신을 차갑게 대한 처형이 종교인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종교인들에게 맹목적인 적개심을 품어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배용주 광산경찰서장은 지난 12일 브리핑을 열고 “박씨가 불안정한 심리상태에서 여성들을 살해했고 자신의 잘못을 일부 뉘우치고는 있지만 범죄에 대해 후회하거나 깊게 뉘우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며 “광주시내 지도를 들고 다니면서 폐쇄회로 TV나 사람이 많지 않은 골목길 주변 교회를 범행 대상으로 삼는 치밀함도 보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박씨가 뚜렷한 원한관계가 있는 사람이 아닌 불특정다수를 범행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검거되지 않았다면 추가 피해자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아찔한 사건이었다. 두 범행 사이에도 교회를 물색하며 배회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현재 이 사건으로 희대의 연쇄살인마들이 또 다시 주목받고 있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연쇄살인마들은 박씨처럼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포함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인했다.
이들 연쇄살인마는 등장하는 기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다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다. 17명을 살해하고 1975년에 검거된 김대두, 1982년 총기난사로 주민 60여 명을 살해한 우범곤, 가진 자들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으로 5명을 살인한 지존파는 20여 년에 걸쳐 등장했다.
이처럼 7년여에 한 번 꼴이었던 살인마의 등장이 급물살을 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지존파 등장 이후 나타난 온보현을 필두로 막가파, 정두영, 유영철, 정남규, 정성현 등의 살인마가 2년에 한 번 꼴로 출현한 것.
지난 2월 검거된 강호순은 혜진·예슬양을 살해한 정성현이 검거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등장했고, 이번에 연쇄살인을 저지른 박씨는 강호순이 검거되고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모습을 나타냈다. 흉악범이 등장하는 기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연쇄살인마는 단연 유영철. 2004년 7월 세상에 이름을 알린 유영철은 서울 서대문, 종로, 강남 등지에서 부유층과 성매매 여성 등 20명을 살해했다. 그의 살인 동기는 부유층에 대한 반감과 여성에 대한 혐오감과 적개심.
가난에 찌들었던 어린 시절은 부자들에 대한 미움을 쌓이게 했고 부인의 일방적인 이혼통보와 애인에게 버림받은 기억 등은 여성에 대한 복수심을 키웠다.
떠오르는 살인의 추억
잊을 수 없는 이름들
그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봐도 이는 뚜렷이 드러난다. 부유층과 출장마사지 여성 등이 주요 타깃이었던 것. 유영철은 검거된 후 “여성들이 함부로 몸을 놀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부유층들도 좀 각성했으면 합니다”라는 말로 자신의 범행을 합리화시키기도 했다.
범행 수법과 증거인멸 기술도 살인이 반복될수록 늘어갔다. 한 명 한 명 희생자가 늘어나는 만큼 살인기술도 몰라보게 진화해 갔던 것.
그는 자신이 직접 범행에 쓸 흉기를 만들었다. 시중에 파는 도구를 이용하게 되면 구입경로 등이 노출되어 덜미를 잡힐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살해한 후에는 피해자의 신원을 알지 못하도록 살해한 여성의 지문을 흉기로 도려내거나 불을 지르는 등의 방법을 사용했다.
사체 처리에도 공을 들였다. 유영철은 주로 사체를 토막 내 암매장하는 방식으로 시신을 유기했다. 자신의 집 안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시신 절단 작업을 했다는 사실 등을 진술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다른 연쇄살인마는 유영철을 롤모델로 삼았다는 정남규. 그는 2004년 1월부터 봉천동 세 자매 등 13명을 살해했다. 정남규는 특정인에 대한 원한이나 돈을 벌 욕심 등이 아닌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불만과 자신에 대한 욕구불만이 범행동기였다. 특히 “부자를 죽일 때는 희열을 느꼈다”고 말할 정도로 부유층을 증오하기도 했다.
정남규 역시 치밀한 범행 수법으로 많은 이들을 경악시켰다. 범행을 할 때마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속옷도 입지 않았고 범행도구를 담은 신발주머니가 소지품의 전부였다. 또 마스크와 안경으로 철저히 자신을 위장한 채 범행을 저지르는 치밀함도 보였다.
경찰에게 잡힌 뒤에도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운이 나빠서 붙잡혔을 뿐 잡히지 않았다면 살인을 계속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 것은 연쇄살인마가 가진 잔인함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지난 2월 검거돼 충격을 던졌던 강호순 역시 희대의 연쇄살인마 중 하나다.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라기엔 너무나 선한 얼굴을 가졌던 강씨에게 사람들은 더욱 경악하기도 했다.
강호순의 살인 동기는 자격지심이나 사회의 불만이 살인동기였던 여타 범인과는 확연히 달랐다. 강호순은 “네 번째 부인이 죽은 뒤 여성들만 보면 살인충동이 일어났다”며 범행을 저지른 이유를 설명했지만 그의 사생활과 용모, 피해자의 면면 등은 그가 전형적인 ‘서구형 사이코패스’ 범인임을 말해주고 있다.
살인행위 자체에서 느끼는 희열, 성적우월감과 과시욕구가 여성들의 살인을 불렀다는 것. 여기에 남다른 성적욕구와 잔인성이 더해져 참혹한 결과가 만들어졌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강호순도 여느 연쇄살인범과 마찬가지로 범행이 반복될수록 대담하고 침착하게 살인을 했다. 처음 그가 타깃으로 삼은 여성은 노래방 도우미. 업소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고 1대1 만남도 비교적 쉬웠던 탓이다.
그러나 몇 번의 범행 뒤엔 더욱 대담해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완전범죄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나는 행동이다.
이렇게 자신과 단둘이 차 안에 있는 상황을 만든 강호순은 성폭행 후 스타킹이나 넥타이 등으로 목을 졸라 살해하는 단순한 방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다른 범인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터득해 살인법을 조금씩 바꾼 것과는 달리 일관된 방식을 고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살인마들은 조금씩 다른 동기와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이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범행을 계속할수록 살인행위에 중독되어 갔다는 것.
정남규는 “살해한 뒤 죽은 사람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를 느꼈다”고 말해 사람을 죽이는 것에 중독됐다는 것을 알게 했다. 유영철도 마찬가지다. 유영철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한 살인이 점차 쾌락으로 변질돼 계속해서 살인을 저질러야만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고 분석한 바 있다.
살인에 중독된 살인마들
반복되는 범행에 ‘희열’
이는 두 명의 교인을 살해한 박씨도 덜미를 잡히지 않았다면 범행에 중독돼 수많은 피해자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역대 연쇄살인마들은 범행의 횟수가 늘어가면서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며 “자칫하면 이번 ‘교인 살해 사건’도 피해자들이 크게 늘어날 수 있었던 만큼 ‘묻지마 범죄’를 사전에 방지할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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