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제 안에 악마가 있어요. 그 악마가 한 짓이에요"
정두영은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9명을 살해하고 9명에게 중상을 입힌 강도살인범이다. 1968년 부산광역시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2세 때 아버지가 숨지고 어머니가 재혼하자 삼촌집에 맡겨졌다. 정두영은 늘 자신의 왜소한 외모 탓에 심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1988년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때도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서였다고 했다. 고아원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정두영은 체포 후 진술에서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갖고 싶었다고 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그 때까지 절도 및 강도로 모은 돈을 쓰지 않고 통장에 모았고 그 총액은 1억 3천만원에 달했다. 정두영은 강도행각으로 총 10억을 모아 결혼도 하고 PC방과 아파트를 마련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정두영은 지난 1999년 6월부터 강도행각을 벌이면서 18명을 살상하였다. 정두영은 18세 때인 지난 1988년 불심검문 중인 방범대원 김찬일(43)씨를 살해하여 11년 간 복역하고 출소한 뒤 곧 바로 절도죄로 붙잡혀 다시 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1999년 3월 출소 이후 10개월 동안 주로 부산, 울산, 경남을 중심으로 다시 16번의 강도 범행을 하였고 그 과정에서 9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유영철이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했던 바로 그 살인마. 정두영도 사용 흉기로 둔기를 사용했고 유영철이 이를 본받아 자신도 둔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두영은 둔기를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라 침입한 집에 있는 둔기를 아무거나 집어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경찰도 처음에는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정두영 범행 일지
1999년 6월 2일 부산
서구 부민동 부유층의 한 주택에서 홀로 집을 지키던 가정부가 살해됐다. 양손이 묶인 채 머리와 얼굴 부위가 거의 으스러질 정도로 잔혹하게 가격 당한 후 화장실 바닥에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강도를 가장한, 면식범에 의한 원한 살인'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시작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고 안방 장롱등을 뒤졌으나 현금 10여 만원과 패물 몇가지만 사라졌고 범행에 사양한 듯 보이는 부엌칼은 집 뒤편에 놓여있었으면 피묻은 옷과 신발은 담벼락 밑에서 불에 탄채 발견된 점이 수사에 영향을 준 것이다. 즉 피해자나 집주인에게 원한을 가진사람이 집에 들어와 피해자를 살해하고 강도로 위장하기 위해 패물등을 훔쳤고 피묻은 옷을 태워 증거를 인멸한후 도주했다고 생각한 것이었으나 이는 경찰의 착오였다. 당시 피해자의 집이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 관사의 옆집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되어 수사에 참고로 하였으나 후일 우연한 일로 밝혀졌다.
1999년 9월 15일 부산
서구 동대신동 한 고급 빌라 두 집에 도둑이 들었다. 602호와 603호가 털린 것이었는데 비어 있는 603호에는 현금과 귀금속 등 900만원 상당의 금품만이 사라진 것이었고 603호에는 770만원 상당의 금품 뿐만 아니라 가정부까지 무수한 폭행을 당한 후 무참히 살해된 사체로 발견되었다. 부민동 사건과 유사한점이 있었지만 칼이 사용되지 않은면과 증거 인멸 방법이 다르다는 점을 들어 이것을 수용하지 않고 각각의 사건으로 보고 수사를 재개하였다.
1999년 10월 21일 울산
남구의 고급 주택에서 어머니(53)와 아들(24)을 각각 안방과 작은 방에서 둔기로 수십 차례 강타당하는 등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귀가한 아버지가 안방과 작은 방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아내와 아들의 사체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범인이 방안을 뒤져 현금, 귀금속 등 1,290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쳐간점에 주목하여 강도 살인 사건에 무게를 두었다. 모자가 함께 살해되었고 둔기로 몇십차례 강타 다하는 등 일반 강도 살인에서는 볼 수 없는 과다 공격 현상의 두드러져 강도를 가장한 면식범에 의한 원한이나 치정 살인일 가능성도 배제 할수 없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발생한 이전의 사건들과의 연관성은 전혀 검토되지 않았다.
2000년 3월 11일 부산
서구 서대신동 고급 주택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한 여성은 안방에서 무엇인가 부수는 듯한 소리에 놀랐고 안방에서 나온 것은 칼을 든 낯선 남자였다. 그 남자는 여성을 안방으로 끌고 가 야구방망이로 구타했다.
"살려주세요. 아기가 있어요."
남자는 "아기 잘 키워, 신고하면 죽인다"라는 말을 던지고는 금고를 부수고 금품을 챙겨 사라졌다. 피해금액은 6730만원이었고 함께 살던 이 여성의 언니와 가정부는 이미 수 시간 전에 사망해 있었다. 생존자의 진술을 토대로 2~30대 나이에 키가 작고 왜소한 용의자의 몽타주를 작성, 전국 경찰에 수배했다.
2000년 4월 8일 부산
부산 동래구 모 철강회사 정진태(76) 회장의 집에서 정 회장과 가정부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가정부의 비명소리에 들어온 정회장과 친척 할머니를 칼로 위협해 안방으로 끌고 들어가 정회장을 협박하여 금고를 열게 하고는 목과 몸통을 마구 찔러 살해하고 회장의 친척인 김할머니를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려 실신시키고는 사망한 것으로 착각하여 현금과 수표 2,430만원을 훔쳐 달아났으나 김 할머니는 출동한 경찰에 의해 병원에 응급 후송된 후 목숨을 건졌다. 이 사건에서 범인은 마당에 주차해놓은 2대의 차 중에서 앞쪽에 주차한 국산 고급 승용차를 옆으로 빼놓고 뒤에 있는 고급 외제 차량을 몰고 도주해, 이와 관련해 숱한 추측이 벌어졌다. 목숨을 건진 할머니의 진술과 목격자들의 진술을 종합해 몽타주를 작성, 전국 경찰에 수배했는데 이 몽타주는 3월에 발생한 범인의 몽타주와는 인상이 많이 달랐다.
4월 발생한 동래구 사건의 살인범의 몽타주
동래구 사건은 사건발생 4일 후인 4월 12일, 당시 KBS의 <공개 수배 사건 25시>에 방송됐다. 경찰은 부산 일대의 강절도 전과자들의 추적 수사를 가했고, 그 중에는 살인 및 절도 등 전과6범으로 1999년 3월 출소한 정두영(31)이 있었다. 형사는 정두영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했고, 정두영은 침착하고 당당하게 "겨우 맘 잡고 사는데 너무 그러지 마십쇼"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소재가 확인되지 않는 다른 전과자들을 또 찾아 나섰다.
2000년 4월 12일 충남 천안
고급 주택가에서 인질 강도 사건이 일어났다. 외출 후 집에 돌아온 여성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은 칼을 든 강도였다. 이 여성이 집을 뒤져 현금 300만원을 찾아 주었고, 만족하지 못한 강도는 "이렇게 좋은 집에 돈이 이거밖에 없나?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이야?"
남편에게 현금 천만원을 찾아오라고 전화를 시켰다. 이 여성은 평소 사용하지 않는 호칭과 용어와 어투로 전화했고 남편은 위험한 상황임을 확신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체포된 정두영
형사가 만 원권으로 천만 원이 든 가방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 밖에는 형사 10명이 몸을 숨긴 채 사방을 에워싸고 있었다. 칼을 든 채 돈가방을 건네받은 강도는 가방을 열어 확인 후 형사와 여성을 남겨둔 채 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서는 순간, 집 안에 있던 형사가 소리쳤고 대문 밖에 대기하던 형사들은 강도의 얼굴에 가스총을 발사했다. 잠시 비틀거리던 강도는 대문을 닫아걸고 담장을 넘어 도주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강도를 놓쳐 버린 듯 했으나 한 형사의 뒤 쪽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고 뒤로 도는 순간 무엇인가가 튀어나갔고 형사는 몸을 날려 작은 체구의 범인을 검거했다.
정두영은 여죄를 추궁하는 질문에 극구 부인했지만 형사들은 정두영과 함께 <공개 수배 사건 25시>를 시청하며 정두영의 반응을 살폈다. 부산 동래구 사건이 자오자 정두영은 고개를 들지 못했고 화면에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 문양을 보여주자 정두영은 발을 감추듯 뒤로 뺐다.
동래구 사건의 범인임을 확신한 형사들은 동래구 사건의 생존자 할머니에게 정두영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육안으로 확인도 했다. 정두영이 신고 있는 신발과 범행 현장의 족적도 일치, 정두영은 범행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2000년 3월 부산 서대신동 사건의 생존자의 확인으로 이 사건의 범인임이 추가로 밝혀졌고 계속되는 추궁에 정두영은 울산, 동대신동 빌라, 부민동 강도살인 사건과, 알려지지 않은 몇 건의 강도상해 사건도 자신의 범행임을 자백했다.
정두영은 1999년 6월부터 2000년 4월까지 10개월 동안 총 16건의 절도 및 강도를 저질러 9명을 살해, 8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총 3억여 원의 금품을 강탈했다.
정두영은 체포된 뒤 왜 피해자들을 잔인하고 난폭하게 살해했느냐는 경찰의 추궁에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제 안에 악마가 있어요. 그 악마가 한 짓이에요"라고 답했다.
결국 재판에 넘겨져 2000년 7월 21일 1심에서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받았다. 그리고 장물취득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그의 형 정부영과 또다른 공동 정범 김종준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피고인들은 이에 불복하여 부산고등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2000년 11월 30일 부산 고등법원은 이들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항소를 모두 기각하고 정두영에게 사형, 정두영의 형인 정부영과 공범 김종준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유지했다. 정두영은 대법원에 상고를 포기,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1997년 이후로 더 이상의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형수로 현재도 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와 MBC 히스토리 후에서 방영되기도 하였지만 희한하게도 사건 당시와 검거, 판결시에도 굵직한 역사적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주목받지 못했다가 후일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을 계기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물론 정두영은 비정한 살인마였지만 아기 엄마를 살려주는 등 최소한의 인간성이 있다고 볼 소지가 있었고 본 목적은 엄연히 강도였다는 점에서 살인 행위 자체가 목적이었고 양심 자체가 없었던 유영철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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